“내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공대식(31)씨는 일을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나는 그 ‘다행이다’를 이용해 대식씨와 같은 이들을 저임금으로 부리거나 보조금을 받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업장의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다. 보조금을 올려받으려고 장애등급을 높여오라는 모욕적인 강요를 서슴지 않고 하기도 한다. 당신 말고도 일하고 싶은 장애인은 많다는 식이다. 취업의 문은 좁고, 일을 구했다 한들 봉투 붙이기, 자재 나르기 등 단순 업무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나 역시 대식씨의 일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현수막 제작업체 ‘노란들판’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 ‘노란들판’의 소개글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노동의 공간.’
노란들판의 문제의식은 노들장애인야학에서부터 출발한다. 장애인의 교육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노동권으로 이어진 것이다. 노란들판의 대표는 노들야학을 만드는 과정부터 함께한 자원교사 출신이다. 공대식씨도 노들야학 졸업생이다.
그가 야학을 찾은 나이는 스물세 살이었다. 그곳에서 5년을 공부했다. 스물이 넘어 중등 교과과정을 시작하는 대식씨지만 노들야학에서는 어린 축에 속했다. 그와 한 교실에 앉은 나이든 학생들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성인이 된 뒤에야 교육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또한 불편한 몸으로 학교는커녕 집 밖 외출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복지관에서 가서 자원봉사자들에게 수업을 받는 것이 전부였다.
휠체어에 앉은 공대식씨를 보며 그의 통학길을 더듬었다. 먼 길이다. 절대적인 거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집 앞 골목조차 짧지 않은 거리였을 것이다. 대식씨는 오른손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몸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중증장애를 겪고 있다. 휠체어로 이동하는 것도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활동보조인이 기울어지는 그의 몸을 바로 세워주는 등 옆에서 수족 노릇을 해주었다. 활동보조인이 보편화된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는다. 2004년 당시 그는 바깥 외출을 꺼린 채, 어머니에게 그 모든 일을 맡겼다. 그런 그가 집을 나선 것이다.
두렵고 불편했던 길 끝에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보상을 톡톡히 받았다. 친구가 생긴 것도, 사람들과 오래 대화를 한 것도, 교실에 앉아 배움을 가진 것도, 여행을 떠나는 것도 야학에 와서 처음 경험한 일들이었다. 술 또한 그때 처음 배웠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싶던 일들을 야학 동기들은 태연히 해나갔고 그도 따라나섰다.
그는 성인이 돼갔다. ‘장애’라는 이유로 유보된 성인 의식이었다. 자신의 병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어린 그는 지금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걸어다닐 수 있었다. 휠체어를 이용해 이동하는 지금의 몸과는 달랐다.
“예전에는 이렇게 될 거라고 얘기만 들었거든요. 와닿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장애가 진행되니까. 나중에는 겁도 나고 검사받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그런 게 있었어요.”
장애는 조금씩 진행되고, 많은 것을 앗아갔다. 신체적 불편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몸이 변해갈수록 말수가 적어졌다. 그저 수줍음을 잘 타던 성격은 사람들과 말을 하려면 식은땀부터 날 정도로 의기소침하게 변했다. 사람과 어울린 적이 없는 탓이었다. 게다가 마비가 진행되는 탓에 호흡이 여의치 않아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대화는커녕 도움이 필요해도 말하지 못했다.
소리 내지 않으면 무시하는 세상“예전에는 그냥 가만히 있는 거예요. 남한테 부탁을 하지도 못하고. 내가 말을 안 하니까 사람들은 모르고….”
야학에 다니기 전 간간이 나가던 복지관에서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한두 번 챙김을 받다가도, 스스로 요구하지 않으니 어느새 잊혀져 없는 사람이 돼버리곤 했다. 그러나 이제 대식씨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을 어색해하지 않는다. ‘말 안 해봤자 나만 손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런 변화에는 대식씨에게 말을 걸어준 야학 친구들이 있다. 야학에서 그는 관계를 경험했다. 관계 속에서 친근한 표현을 하고 의사를 전달하며 요구하는 법을 익힌 것이다. 그의 요구는 이제 자연스럽다. 자신의 몸을 바로잡아달라고, 이동을 하게 해달라고, 손을 빌려 달라고 말한다.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세상은 없는 이 취급을 하기 일쑤다. 이는 장애인 인권 문제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2000년대는 이들의 목소리가 수면 위로 드러난 때다. 장애인 이동권과 교육권, 차별금지 법안 등 다양한 사안이 이슈가 되었다. 노들야학은 장애인의 교육권 문제로 긴 싸움을 했다. 14년간 노들야학의 거처였던 정립회관이 ‘운영 및 공간 부족의 이유’로 퇴거 요청을 한 2008년에는 그 싸움이 더 치열했다. 고학력으로 치닫고 있는 사회에서 장애인의 절반 가까이가 중학교 졸업장을 가지지 못했다(2008년 보건복지가족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최종학력으로 무학을 포함한 중학교 이하의 학력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이 65.4%다). 교육권은 이 사회에서 장애인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권리지만, 현실은 자립적인 교육 공간조차 보장하지 않았다. 당시 재학생이던 대식씨에게 ‘거리에 나갔느냐’고 물었다. 그는 앞서지 않았지만 뒷줄 정도에 있었다며 가벼이 말했다.
“옳은 일 하는 거니까요.”
한겨울 80일간의 길거리 수업을 해온 노들야학 문제는 해결이 됐다. 서울 종로에 새로운 배움터를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대식씨는 졸업을 한다. 노란들판에 취직을 한 것이다.
대식씨의 표현대로라면 ‘운이 좋았다’. 어느 날 노란들판에서 진행하는 ‘디지털프린팅 잡(job)자’ 소식을 들었다. 직업훈련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덥석 지원부터 했다. 꿈, 미래와 같은 것은 먼 이야기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일이 필요했고, 하고 싶었다.
훈련생 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디자인을 위한 컴퓨터 기술과 프로그램 사용법을 하나씩 배워나갔다. 디자인이란 컴퓨터 기술과 세밀함을 요하는 작업이지만, 배운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노동력의 효율이 높지 않다는 이유로 대식씨와 같은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일이었을 뿐이다.
당연한 취업이 되레 미안한대식씨는 유일하게 자유로운 한 손으로 컴퓨터 마우스를 움직여 일을 배웠다. 6개월간의 훈련생 생활이 끝나고, 그를 비롯한 3명이 남았다. 그들은 현재도 노란들판에서 디자인과 출력을 담당하고 있다. 당시 정식 직원이 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지원하는 사람이 많았나 봐요’라고 물으니 그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일하고 싶은 사람이 많으니까요.”
그러나 일을 할 수 없는 형편들이다. 교육을 받으려고 높다란 벽을 뚫었더니, 더 높이 솟은 취업의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부는 장애인 고용을 확대한다며 ‘장애인 의무고용제도’를 시행하지만(현재 50인 이상 노동자를 고용한 사업주는 전체 인원의 3% 범위 내에서 장애인을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한다), 지켜지지 않는다. 차라리 벌금을 내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보편적이다.
어렵사리 받은 교육이지만, 이들은 사회로 유입될 기회를 박탈당한다.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대식씨는 디자이너 일을 하게 된 것은 컴퓨터 사용이 익숙했기 때문이라며 씁쓸히 말을 덧붙였다. 집에서 홀로 할 수 있던 것이 게임밖에 없었단다. 사회에서 퇴출돼 집으로 돌아간 이들은 다시 홀로 된다. 이들은 대식씨의 마음 한켠에 걸린다. 취업에 대한 절실함이 그들보다 덜했다고, 자신은 운이 좋아 일자리를 구했다며 미안해한다. 장애인 대다수가 일할 권리를 박탈당한 현실은 대식씨의 당연한 취업을 미안함으로 탈바꿈시킨다.
그에게 노란들판에 바라는 점이 있느냐고 물으니, 규모가 커지면 좋겠다는 답이 돌아온다. 몇 푼의 이윤과 빠른 성장이 아닌, 더디더라도 ‘몇 발자국의 희망과 연대’를 소중히 한다는 노란들판의 취지 속에 있는 그이지만, 자신과 같은 이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내는 것이다. 지난해, 노들야학 출신의 직원 1명이 새로 들어왔다. 성에 차지 않는 수다. 하지만 그의 직장은 재정이 빠듯한 작은 업체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막상 일을 하면 그 생각을 잊어버린다고 대식씨는 농담을 한다. 그에게 노란들판은 단순한 일터를 넘어서는 의미다.
대식씨의 업무는 디자인만이 아니다. 주문처와 의견을 교환하고 주문서를 작성하는 등 자잘한 업무들도 함께 주어진다. 그럴 때마다 그는 활동보조인의 손을 빌린다. 때론 동료들의 도움을 받는다. 그는 홀로만 일할 수 없다, 누구나 그렇듯. 그의 옆에 활동보조인이 상주한다. 활동보조인은 한 손만 사용하는 대식씨를 위해 작업 중에 오는 주문전화를 받고, 화면 자판을 사용해야 하기에 더딜 수밖에 없는 그의 문서 작업을 거들어준다.
도움을 받으며 컴퓨터 앞에 몸을 붙이고 앉은 그의 표정은 진지하다. 진지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오늘은 일감이 밀려 바쁜 날이라고 한다. 그가 어렵게 시간을 내 인터뷰하는 내내, 노란들판은 분주하다. 현수막을 뽑는 기계가 내는 소음 사이로 간혹 전화벨이 울린다. 연이어 느린 말투의, 단박에 몸이 불편함을 짐작할 수 있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식씨와 같은 디자이너들은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는다.
여느 회사원과 다를 바 없는 출퇴근을 하고, 때론 야근을 하며, 한 달에 한 번 회식을 하고, 주말에는 잠자기 바쁘며 자신이 좋아하는 자동차를 인터넷상에서 찾아보는 데 시간을 보낸다는 그는 여느 회사원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디자인 일에 재미를 붙였다는 그에게 일을 해서 행복하냐고 물으니, 머뭇거린다. 그러다 말한다. ‘다행’이라고.
나는 곧 ‘행복’을 물은 것을 후회했다. 뒤이어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잘 모르겠어요…. 딴 사람들보다 난 일할 게 있으니까, 행복해야 할 것 같아요.”
글 희정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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