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 명을 살해한 노르웨이 연쇄테러범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32)의 사건도 그의 덤덤탄에 맞아 저세상으로 잊혀져갈 어린 희생자들의 운명처럼 차츰 잊힐 것이다. 그사이, 이 분요한 세속의 박자와 리듬에 곁붙어, “잔혹했지만 필요한 행동이었”음을 강변하면서 ‘템플기사단’ 군복을 입고 법정에 서겠다던 이 시대착오적·증상적 존재를 두고 갖은 분석과 해명이 얼마간 오갈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우리 사회의 현실에 빗대거나 겹쳐보면서 반면교사나 타산지석으로 삼자는 둥, 갖은 비평과 조언이 이어질 것이다. 매스컴을 통해 진단과 전망의 이름으로 전달되는 그 말들은 이미 여러 차례 들은 말이거나 멀거니 해봄직한 말이거나 해도 별 뾰족한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할 말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 무수한 말들 사이로 총기 자체에 대한 말은 아무래도 억압되는데, 그 억압의 기원은 현 세계체제의 근간에까지 닿아 있다.
국가, 가족 그리고 휴대전화
2004년 11월17일 치러진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광주 지역) 중 100여 명의 수험생이 휴대전화를 이용해서 대규모 부정행위를 한 게 드러나 우리 사회의 화급한 이슈가 된 적이 있다. 당연히 이 사안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글들이 각종 매스컴을 통해 쏟아졌지만, 어떤 글에서도 휴대전화 자체에 대한 논의는 완전히 생략되어 있었다. 교육부의 부실한 대처, 청소년들의 도덕불감증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방치한 교사들과 학부형의 무관심과 태만, 본(型)도 생산적 권위로서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기성세대를 겨냥한 두루뭉술한 비난, 그리고 당사자들에 대한 도덕적 권면과 질책 따위가, 이미 들은 말들이거나 하나 마나 한 말들의 시리즈를 이루면서 재생산될 뿐이었다. 역시, 이 경우에서도 세계체제의 기원에까지 닿아 있는 비판이기에 반드시 억압되어야 하는 말, 요컨대 휴대전화 자체에 대한 근본적 논의는 어느 누구도 손대지 않았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한국의 이혼율이 가장 높다. 2010년 통계에 따르면, 황혼이혼은 급속히 증가해서 전체 이혼 중 27.3%를 차지해 결혼 4년 내 신혼이혼(25%)을 처음으로 따돌렸다. 내 주변에만 둘러보아도, 역시 본이 될 만한 혼인 생활은 찾기 어렵고, 하나같이 이런저런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이 고장났지만 환불되지 않는 고래의 상품을 두고 어찌할 줄 모른다. 이 와중에 자살률이나 음주량마저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러, 어느 외신 기사는 “한국 전 국민 신경쇠약 걸리기 직전”이라는 기사를 띄우기도 한다. 이것 역시 갖은 분석과 진단의 대상이 되어 수많은 보도와 논의를 낳지만, 정작 문제의 알짬은 들먹이지 않고 억압된다. 국가 자체를 해체하려는 논의가 세계체제의 근간을 흔들 수밖에 없듯이, 가족 자체의 성격과 구조를 비평하는 일은 늘 방외자들의 몫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호작용의 틀은 빠진 채로내가 간여한 공부모임에는 각지에서 참여하는 교사들이 적지 않은데, 그들의 한결같은 고민은 선생 노릇을 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서둘러 퇴직해서 좀더 간소하고 자발적인 삶의 양식을 챙기는 이도 있고, 고충과 불만을 생계의 무게 아래 잠재운 채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이도 있다. 끊이지 않고 간간이 전해지는 하극상의 교실 풍경이 보여주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갈 상호작용의 틀, 그 응하기의 절차와 본(型)이 송두리째 빠진 사이로 자본과 이에 수반된 세속적 가치가 활개를 친다. 칸트의 낡은 말처럼, ‘훈육이 빠진 교육’이 밑 빠진 독의 신세처럼, 어떤 침묵과 억압의 고리에 물려 한없이 삐걱거리면서도 마치 강박처럼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김영민 철학자·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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