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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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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웃음으로 다진 단단한 인생

투쟁하던 청년에서 사업가로, 글을 듣는 출판기획자로…이건범씨 “전과, 장애, 파산은 나의 유일한 자산”
등록 2011-06-24 15:33 수정 2020-05-03 04:26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하나의 영혼의 무기였다. 유머는, 인간의 기질 중 다른 어떤 것보다도,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우뚝 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줄 수 있다. 단 몇 초 동안만일지라도.”( 빅터 프랭클 지음, 제일출판사 펴냄)
최근 (상상너머 펴냄)을 저작한 이건범(47)씨는 빅터 프랭클의 같은 책에서 다른 문장을 인용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견뎌낼 수 있다.” 그는 나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으려고 웃음이란 무기를 발견한 빅터 프랭클의 문장 사이에서 ‘힘들수록 웃음을 찾으라’는 지혜를 얻었다고 했다. 민주화운동을 하며 1986년과 1990년 두 차례 구속 수감돼 감옥에서 보낸 청춘의 경험을 쓴 그의 책은, 그래서 암울한 시절을 배경으로 하지만 문체는 재기발랄하다. 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어 들춘 책날개에 소개된 작가 프로필은 시절과 문체의 역설보다도 엉뚱하다. 스무 살이던 1983년부터 지난 30여 년간 그는 남들이 하나 겪기도 힘든 경험으로 삶을 채워넣었다. 민주화운동, 수감, 창업, 사업의 승승장구, 파산, 시각장애, 출판기획자로 성공. 그러나 롤러코스터를 타듯 삶의 질곡을 오르내리기만 했다면 그가 궁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웃음의 가치를 잊지 않고 챙기는, 여유 있는 그 마음이 궁금해서 만났다.

이건범씨는 고단했던 과거를 얘기할 때도 깊고 환하게 웃었다. 그는 20대의 수감 생활 중 ‘힘들수록 웃음을 찾으라’는 지혜를 얻었다고 말한다. 한겨레21 박승화

이건범씨는 고단했던 과거를 얘기할 때도 깊고 환하게 웃었다. 그는 20대의 수감 생활 중 ‘힘들수록 웃음을 찾으라’는 지혜를 얻었다고 말한다. 한겨레21 박승화

민주화운동으로 20대를 채우다

“전과, 장애, 파산. 이 세 개는 나의 유일한 자산이에요. 바깥으로 팔아먹을 수 있는 재산이란 뜻일 수도 있지만(웃음),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죠.”

흔히들 피하고 싶은 세 가지를 자신의 3대 자산이라 여기는 사람, 이건범씨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83학번이다. 1983년, 푸른 꿈을 안고 입학한 대학이건만 시절은 학생들에게 무색무취를 요구했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1980년 광주의 참상을 알게 된 그는 에서 당시의 학교를 이렇게 회상한다. “광주학살은 당시 우리 친구들 모두를 잠 못 이루게 만드는 악령이었다. 그 악령은 학교 안에서 우리를 감시하던 사복경찰의 폭력으로, 매일 ‘살인마’ 전두환 대통령을 찬양하는 언론의 비굴함으로, 무기력하게만 보이는 기성세대와 학자들의 소심함으로, 노예처럼 일해야 하는 노동자와 처참하기까지 한 빈민의 남루한 생활로 살아나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된 우리의 일상을 짓눌렀다.”

그리고 곧바로 민주화운동에 투신, 대학 4학년인 1986년에 개헌 요구 집회에서 체포돼 당시 “공포의 가장 첨예한 아이콘”이었던 감옥, 영등포구치소에 구속 수감됐다. 졸업 뒤에도 반정부 지하운동을 펼친 그는 1990년 11월 경찰의 미행에 걸려 국가보안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또다시 구속 수감된다. 서울구치소에서 1심, 영등포구치소에서 2심 재판을 받고 3년형이 확정돼 전주교도소에 갇혀 살다가 2년4개월 만에 특사로 나왔다. 그때 나이 서른이었다. 그래서 그의 20대는 이렇게 정리된다. 대학 입학, 민주화운동, 첫 구속 수감, 집행유예, 무기정학, 복학, 졸업, 결혼, 두 번째 구속 수감.

독재정권은 그의 20대에 수갑을 채웠지만 그가 회상하는 감옥에서의 삶이 마냥 어둡지만은 않았다.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그랬듯 그도 전주교도소에서 ‘빵살이’(감옥 생활)를 이겨낼 웃음이란 무기를 발견했으므로. 예컨대 이런 사연들. 이씨는 엄숙한 정치범 사동에 철학이나 역사서 대신 스포츠지, 연예주간지, 여성월간지를 처음 들여와 물을 흐려(?)놓는다. 그의 ‘가벼움’은 진지한 정치범 사동에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간다, 이렇게. 아무리 타박해도 매일 남의 방에 와서 과자 빼먹기를 즐겼던 옆옆방의 윤아무개를 혼내주려고 단체로 짜고 몸무게 조작 사건을 벌이는가 하면, 잡생각이 들 때면 을 풀곤 했던 모범생 신아무개 선배가 춤 교본을 들고 와 맘보니 지르박이니 스텝을 밟자고 하는 식으로.

시각장애 1급인 이씨는 컴퓨터 모니터의 바탕을 까맣게 해 글씨를 하얗게 처리해야 보기가 편하다고 한다. 문서를 열어 편집 작업을 하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시각장애 1급인 이씨는 컴퓨터 모니터의 바탕을 까맣게 해 글씨를 하얗게 처리해야 보기가 편하다고 한다. 문서를 열어 편집 작업을 하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파산과 시각장애 1급 판정

슬픔과 분노를 낙관으로 이겨낸 두 차례 옥살이를 마치고 나니 그도 어느덧 30대 기혼자가 되어 있었다.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운동권 전과자를 받아주는 회사가 어디 흔했겠는가. 이씨는 창업을 결심한다. 경쟁이란 자본주의의 속성을 무시하고 기업을 통해 공동체를 일궈보고 싶었다. 꿈은 이루어지는 듯했다. 1994년 교육용 멀티미디어 콘텐츠 회사를 열어 10여 년 만에 100억원대의 연매출을 올렸다. 이름 앞에 ‘작은 거인’ ‘386 출신 최고경영자(CEO)’ 등의 꼬리표를 달고 벤처업계의 신흥 주자로 떠오른다.

그러나 그가 꾸린 회사는 이른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벤처기업은 아니었다. 그는 적은 자본과 기발한 아이디어로 거액의 투자를 받고 ‘쪽박 아니면 대박’의 기로에 놓이기보다는 사람도 기술도 차근차근 쌓아가는 방식을 택했다. 10여 년 동안 교육용 콘텐츠를 개발하는 데만 매달린 이유다. 그런데 다른 회사들이 규모를 키우고 펀딩하고 투자 유치를 하며 커가는 모습을 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마따나 “허파에 바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알맹이도 있고 (인적) 자원도 있는 회사인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직원들 사이에서 퍼졌어요.”

이씨가 꾸리던 회사도 투자를 받아 온라인 사업에 진출하기로 했다. 그러나 “성과가 기대한 것만큼 나오지 않았죠. 갑자기 회사가 커지니 상황과 전략 판단이 힘들었어요. 돌이킬 수 없더군요. 2002년 한 해 손실이 30억 정도였어요. 직원들 월급이 연체되고, 그동안 그들에게 줬던 믿음이 깨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힘들었어요. 2006년 초에 사업을 접었어요. 모든 걸 내가 떠안기로 하고. 가족들이 힘들어졌지만 아내가 많이 이해해줬죠.”

그렇게 12년 만에 회사는 파산했다. 이씨 개인도 파산을 했다. 설상가상 젊었을 때부터 좋지 않던 시력은 더 나빠졌다.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시야가 좁아지고 사물의 형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쨍하게 맑은 날도 그의 시력으로는 안개낀 듯 부옇기만 했다. 그런 그가 다음 직업으로 택한 일은? 책을 기획하고 쓰는 일을 하기로 한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팔이 아플 땐 팔로 할 수 있는 일을 가장 먼저 포기하고, 머리가 아플 땐 골치 아픈 일이라면 손사래 치고 싶다. 예민한 이라면 손끝 하나 아려도 일상에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이씨는 둔감한 사람인 걸까. 그의 20대와 30대를 돌이켜보면 그렇지도 않다. 20대의 이씨는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해 민주화운동으로 청춘을 불태웠고, 30대의 이씨는 회사를 꾸리며 직원들 희로애락에 공감점을 찾으려고 기민하게 움직였으니.

“변심하는 진지함은 싫다”

모니터에 문서창을 띄운다. 화면의 흑백을 전환한다. 까만 바탕에 커다랗게 박힌 흰 글씨들. 깜박이는 커서처럼 눈을 깜박깜박하며 읽었던 부분을 찾아 내려간다. 코끝이 거의 화면에 닿을 지경이다. 원고와 본의 아니게 하나가 되어 그는 읽고 쓴다. 전체를 읽어 내려가면서 편집을 해야할 때는 문서화한 글을 오디오로 전환해 들으며 원고를 읽는다.

그저 하고 싶기에 시작한 일이었다. 낙천적 성격이 파산 뒤 삶을 그저 부유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나마 눈이 보일 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개척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노하우가 됐든 뭐가 됐든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결과는 “뭐가 됐든” 그 이상이었다. 2008년 출판 기획 일에 뛰어들어 2년 만에 세상에 내놓은 책 은 2010년 출판문화상을 받았다.

한시름 돌릴 틈도 없이 올해 그는 새 책을 펴냈다. 1980년대의 경험을 어떤 형태로든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 넘겨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만이 겪었던 경험을 날것으로 넘겨주는 방식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페이스북(facebook.com/thistiger)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의 페이스북에서 연재글을 찾아볼 수 없는데, 이유는 한동안 연재하다가 7회 정도부터 읽는 이를 제한했기 때문이란다. 댓글을 열심히 썼던 50명 정도에게만 공개했는데, 50명 중 30명 정도는 징역 갔다온 경험이 있고 나머지 20명 정도는 건너건너 공감대가 형성된 이들이었다. 아이디어를 주는 등 일종의 편집인 역할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렇기보다는 댓글에 달린 사실 기록들에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연재와 댓글을 통해) 그때를 추억하며 우리끼리 재밌게 놀아본 거죠. 처음 책을 가제본했을 때는 그 댓글들도 책에 담았는데, 독서에 방해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뺐어요. 다른 곳에 수감된 이들의 경험이 담긴 댓글을 책에 실었다면 그 시절 감옥 생활사를 다 보여줄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의 생의 모토는 어찌 보면 가벼움인지 모르겠다. 웃음과 가벼움으로 무거움과 엄숙함을 물리친다. 그런 와중에 예의 차리지 않고, 그러나 진심으로 인간관계를 쌓아간다. 이번에 출간한 책 표지에 제목을 특유의 글씨체로 써준 신영복 선생과의 관계가 한 예일 것이다. 신영복 선생과 본디 인연이 있었는지, 에서 영감을 받아 책을 쓴 건 아닌지 묻자 “신영복 선생과는 사실 아무런 인연도 없어요. (웃음) 책도 사업하느라 바쁠 때 나와 읽어보지 못했고요. 당시엔 그런 책을 좀 멀리한 경향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편지로 뭐라뭐라 썼어요. 편지 인쇄하고 책 가제본한 거 보내서 표지 글씨 좀 써주십사 부탁드렸죠. 추천사를 써준 공지영 작가도 마찬가지. 하하.”

그러며 관계를 쌓아가는 것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엄숙하고 진지한 사람은 잘 변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지함을 신봉하는 사람들, 웃음이 없는 사람들은 생각이 쉽게 변하더라고요. 숨기는 것보다 드러내놓고 얘기하는 게 좋고, 그래서 사사로운 개인사도 다 얘기하는 편이에요.”

인터뷰를 한 날 그는, 그런 사사로운 수다를 떠는 저녁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전주 교도소에서 함께 수감 생활을 했던 친구들과 신영복 선생을 함께 만나기로 한 것. 가벼운 마음으로 얼기설기 엮은 관계망은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차곡차곡 단단해져 있었다.

두 번째 책, ‘파산’을 알려주마

그는 말한다. “가볍게 살자, 무언가에 집착하지 말고.” 무언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돈, 명예, 정치적 견해 등이 아니겠느냐”고 한다. 그의 다음 책도 그 가벼움 덕분에 기획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가을께 쓰기 시작할 두 번째 책의 주제는 ‘파산’이다. 그는 실패한 과거를 되새기며 통곡하지 않고 가볍게 놓아버린다. 그리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이 경험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무엇을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파산은 징역 갔다온 것이랑 상처의 결이 또 달랐어요. 파산하면서 신자유주의란 이런 것이었구나, 그 안에서 이렇게 허우적거리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회사를 접으려고 보니까 파산에 대해 나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군요.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분야가 아니었는데. 이런 과정 중 느낀 게 많았어요.” 웃음과 가벼움은 사람을 이토록 강하게 추진하는 힘이다.

글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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