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으로 온 나라가 북새통이다. 대통령께서도 가만있을 일이 아니다. 여러 장관들을 불러서 긴급대책회의까지 열었다. 6명의 장관과 나란히 노란 점퍼를 입고 머리를 한데 모아 낸 대책은 “설 연휴 대규모 이동에 대비하라”였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대통령과 장관들께서는 대한민국 국민이 설 연휴가 언제인지 잊어버렸을까봐 이를 다시 상기시켜주는 섬세한 배려를 잊지 않으셨다. 일선에서 100만 마리의 소·돼지를 땅에 묻느라 정신없는 공무원들도 대통령의 살뜰함에 적잖이 놀랐을 것 같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런데 하필 이 타이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대통령께서 당선인이던 시절의 얘기다. 그 유명한 ‘대불공단 전봇대’ 사건을 두고 당선인은 공무원들을 나무랐다. “페이퍼(서류작업)로는 안 된다. 현장에 가서 확인하고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또 덧붙였다. “사무실에서 떠들어봐야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는 당시 공무원들만 보면 말끝마다 “현장 가봤어?”라고 물었다. 그 말은 한동안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혹시나 사무실에 앉아서 지시를 내리는 대통령의 말씀을 믿지 않는 일부 몰상식한 공무원이나 국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을 대신해서 한 말씀만 대통령께 묻고 싶다. 외람되지만 주로 쓰신 표현을 그대로 쓰겠다. “현장 가봤어?”
아니다. 생각이 짧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대통령께서 현장에 갈 문제가 아니다. 아니, 가서는 안 된다. 청와대가 어떤 조직인가. 대통령의 한마디, 손짓 하나까지 심사숙고하고 전전반측하고 때로는 좌고우면하기도 하는 곳 아닌가. 구제역 현장을 찾아 농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현장에서 살처분하는 공무원의 고충에 귀기울이는 대통령의 모습을 안 그려봤을 리가 없다. 아마도 대통령이 현장을 찾지 않은 데는 청와대의 치밀하고 사려 깊은 계산이 있을 것이다. 대통령이 구제역 농가를 찾아간 광경을 상상해보자. 상심에 잠긴 농민의 손을 잡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 편하게 먹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아니면 “나도 한때 소를 키워봐서 안다”라든지, “(청와대 식단에) 닭고기 올려라”라고 한다면? 이거 아니다. 그냥 사무실에서 장관님들과 노란 점퍼 입고 회의 계속하시는 게 낫겠다. 청와대의 판단이 맞았다.
대통령께서 청와대 회의실을 지키는 동안 국민의 단백질 섭취는, 경이롭게도 롯데마트가 챙겼다. 롯데마트는 구제역이 들끓자 미국산 갈비를 할인 판매하겠다는, 대문짝보다는 약간 작은 광고를 일부 일간지에 냈다. 롯데마트는 100g에 1250원 하는 미국산 갈비 250t을 준비했다. 오해하지 마시라. 혹시라도 구제역으로 한우 소비가 줄어든 틈을 타서 한몫 챙기려는 속셈이었다든지, 농촌의 불난 집에 부채질하겠다는 못된 마음씨일 리 없다. 구제역으로 혹시라도 국민에게 부족해질 수 있는 단백질을 공급하겠다는 ‘통큰’ 배포다. 겸손하기도 했다. 공을 ‘동료’들과 나눴다. 마트 쪽은 “수입산 쇠고기 행사는 롯데마트만이 아니라 이마트와 홈플러스도 늘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롯데마트의 ‘늘 고운 마음’이 그저 갸륵할 뿐이다.
정부는 전국에서 100만 마리가 넘는 소와 돼지를 살처분했다고 밝혔다. 차가운 땅속에 떼로 묻힌 눈빛 고운 생명들에게 그저 안타까운 마음을 전한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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