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머스 존슨은 미국을 ‘로마제국의 재현’이라고 말하며, 그것은 군사기지에 의존하는 저급한 군국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리처드 호슬리는 그럼에도 ‘새로운 로마’인 미국이 그 악마적 생명력을 지속하는 이유는 식민지적 종교가 있어서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미군 주둔지가 외적 군사기지로서만이 아니라, 심성 내면에 설치된 ‘신성기지’로서 존속하기 때문이다. 필경 이런 내면의 신성기지가 전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곳은 한국일 것이다.
1893∼1983년 선교사의 90%가 미국인
2003년 1월, 기독교도들이 서울 시청광장에서 대대적인 친미 집회를 열고 있었다. 반미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여론의 탄력을 받던 때였다. 김홍도 목사는 심하게 갈라지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소리를 내질렀다. 영어였다. 군중 10만 명(주최 쪽 추산) 앞에서 한 기도인데 말이다. 사람들은 어느 대목에서 ‘아멘’ 하는 추임새를 넣어야 할지 당황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군중이 아니라 백악관이었고, 그곳 집무실에서 열린다는 기도회와 함께한 신, 아마도 미국 국적의 ‘그 신’에 있었을 것이다.
분자생물학자인 최재천은 찰스 다윈 탄생 200주년 인터뷰에서, 한국인에게 다윈이 그다지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일본 도쿄대학의 사쿠라 오사무 교수의 ‘한·중·일 삼국의 진화론 수용’에 관한 논문을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삼국 가운데 유독 한국인만이 다윈을 경시했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개신교)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미국주의’가 미국에서도 창조론을 절대시하는 가장 보수적인 기독교 우파의 세계관을 그대로 추종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글은 이런 한국 개신교의 미국주의가 어떻게 정착됐는지, 그 뿌리를 체험하는 것을 중심으로 살피는 데 초점을 맞춘다.
1893∼1983년 한국에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의 거의 90%가 미국인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미국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근본주의 신앙을 가졌다. 한편 각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지 분할 협정을 맺었는데, 이 중 미국 선교부에 할당된 영토는 조선 국토의 71%였다. 당시 기독교 신자 수는 평안도와 황해도를 포함한 서북 지역이 전체의 80%를 점했다. 특히 평안도는 개신교의 아성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 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가장 막강했고, 이들의 활약으로 조선 전역에서 미국인 선교사들의 헤게모니가 확고부동하게 되었다.
그것은 1907년의 이른바 ‘평양대부흥운동’ 효과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연구는 이 사건을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과 관련해서 해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군의 진군 루트에 있던 평안도 지역에서 군대의 폭력을 당한 많은 피해자들이 교회로 유입돼 들어온 것이 이 부흥운동의 전사(前史)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평안도는 러일전쟁 10년 전에 일어난 청일전쟁의 주요 전투지였다. 당시 학살의 기억을 지울 수 없던 이곳 사람들에게 일본군은 깊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진군하는 군대의 폭력 또한 무자비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평안도의 1월 살갗을 파고드는 추위에도 사람들은 마을을 비우고 산으로 도주했다. 다행히 교회가 있으면 사람들은 그곳에 몰려 들어갔다. 미국인 선교사들이 진을 치던 곳을 일본군이 함부로 유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교회는 갑자기 사람으로 들끓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준비돼 있지 못했다. 더욱이 두 차례의 전쟁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강퍅해 있었다. 이들은 서로 다투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이웃에게 폭행을 휘두르기도 했다.
이때 지도자들의 선택은 전쟁을 해석하고 그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는 것이었다. 당혹스럽고 난감한 만큼 기도는 절절했겠다. 그리고 뜻밖에도 기도 중에 ‘영의 체험’이 있었다. 교계 지도자들은 흥분했고 열정에 휩싸였다. 곧 이 신령스러운 집회에 교회 전체가 열광하게 되었다.
공동체는 순식간에 ‘잘’ 통합됐고, 지도자들은 강한 윤리 강령으로 도덕의 재무장을 요구했다. 그것은 서로 다투지 말고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아야 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전통적 관행을 증오하고 척결하는 것도 포함됐다. 곧 이들의 강력한 도덕 재무장 운동은 배타적인 종교적·사회적 태도를 포함했다.
조선교회의 원체험, 평양대부흥운동이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그런 운동 방식과 신념의 기조 또한 전국화됐다. 이제 서북 기독교의 독특한 체험은 전 조선의 개신교 신앙을 특성화하는 원체험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하나 더 언급하면, 이 사건 이후 서북의 선교사들이 신학 교육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목사 임용에 관한 일체의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평양대부흥운동은 선교사들이 배타주의적 신앙관을 제도화할 정신적·물리적 자원을 장악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선교 역사에 관한 최근의 수정주의적 연구에 바탕하면, 미국의 국제정치적 정책 형성에서 선교사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특히 그들이 보내온 정보는 그 지역에 대한 미국 시민사회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또한 정치 지도자들의 정책자료로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하여 편견에 기초한 근본주의자들의 순진한 정보는 제국의 국제정치 수단이 되었다.
한데 한국에 파송된 미국 선교사들의 각종 문건에서 엿보이는 조선인 이미지는 동아시아 3국 가운데 가장 부정적이다. 게으르고 불결하고 부정직하고 부패한 족속…, 대충 이렇다. 해서 그들은 조선인은 스스로는 근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타국에 의해서만 개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편견은 그들의 목회관에 그대로 관철됐다.
한편 선교사들은 수많은 교육기관을 운영했다. 1910년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인가된 학교의 35%가 미션스쿨이었다. 미션스쿨은 학생 수가 많았고 시설이 훌륭했다. 또 가장 체계적인 커리큘럼이 있었고, 교사의 질도 높았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선교사들의 문명주의적 편견의 효과는 여실히 드러났다. 1920년대의 한 연구에 따르면, 미션스쿨의 조선인 청년들은 미국인을 닮는 것과 근대화·복음화를 동일시했다. 조선의 역사나 문화,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은 부차적 관심거리로 전락하거나, 관심 밖으로 퇴출됐다. 심지어 음악, 의복, 음식, 가옥 양식 등에서 ‘백인 따라하기’는 기독교 복음의 일부처럼 여겨졌다. 이렇게 백인 우월주의적 신앙과 교육은 조선인 기독교도의 내면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한데 기독교 신자들이 대거 식민지 조선 사회의 엘리트로 등장했고, 그들을 통해 근대주의적 계몽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들은 일본 유학파 출신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대중사회를 이끌었고, 해방 이후에는 가장 막강한 지배계층으로 자리잡는다. 해방 직후까지 기독교 인구는 고작 전 인구의 3%를 넘지 않았음에도, 이들의 담론화 능력은 점차 한국인의 근대주의적 심성을 지배했다.
일본 식민제국은 몰락했지만, 조선의 독립은 유보됐다. 미국은 조선의 자립 능력을 의심했고, 앞서 말한 것처럼 기독교 선교사들의 조선에 대한 이해는 그런 의심의 토대가 되었다.
근대국가 출현에 가장 깊게 개입한 세력종교사회학자 강인철에 따르면, 군정기와 제1공화국 시절 법과 제도가 미비한 상황에서 일제가 버려둔 사회적 자원은 대량으로 교회와 기독교계 지도자들에게 공여됐다. 또한 미국 본국에서 송달된 막대한 후원금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미션스쿨은 더 늘었고, 더 견고해졌다. 특히 개신교계 대학이 설립되면서 엘리트 충원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각 교단의 재산이 엄청나게 불어났고, 얼마 안 가 교단 신학교들이 속속 설립됐다. 개신교 목회자를 위한 고등교육 수준은 다른 종단의 그것을 압도했고, 일반 교육기관의 수준에 비해서도 높은 편에 속했다. 나아가 기독교계 신문과 잡지도 대거 창간됐다. 또한 정계·법조계·언론계·교육계의 요직을 차지한 기독교도 수가 많아 거의 20~30%에 달했다. 전체 인구의 5%도 안 되는 종교에서 말이다.
이렇게 한국의 자주적 근대국가가 출현하는 과정에 한국 개신교는 가장 깊게 개입한 사회세력에 속했고, 그만큼 많은 특혜를 독차지한 집단이다. 국가제도 차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근대가 출현할 때도 기독교는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 특히 한국적 근대가 민족적 열패감과 미국주의 내면화의 결합을 통해 구현됐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한국적 근대를 상징하는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적 근대주의와 개신교 신앙에 대한 논의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음번 글에서 다룰 반공주의와 발전주의적 종교에 대한 분석에 중요한 실마리를 줄 것이다. 바로 ‘영’(靈)이라는 신앙 요소다.
‘영’은 ‘몸의 해체’와 관련된 종교적 체험을 반영한다. 1세기 지중해 지역의 예수파들 사이에서 영은 그런 존재로 등장했다. 어떤 엘리트의 몸도, 어떤 화려한 건축물도, 어떤 강력한 제국도 독점할 수 없는, 생김새도 성향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 그리고 그 종교적 효과를 함축하는 표현이었다. 해서 영은 종종 그 시대의 위대한 몸들에서 배제된 이들의 활기 넘치는 운동으로 나타났다.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에서 ‘영의 관리’는 중요한 지도자의 덕목이었다. 이제 영은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기 시작했다. 이 해석의 왕이 영을 독점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영은 다른 엉뚱한 곳에서 출몰해 특유의 에너지 넘치는 화력을 쏟아냈다.
1905년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영을 담지한 이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영은 기존 몸의 아무것도 해체하지 않으면서 힘을 발휘했고, 나아가 그 몸을 더욱 견고하게 했다. 즉, 영의 해석자가 곧 영의 체험자였다. 지도자의 몸에 안착해 그 몸을 위해서만 봉사하는 영, 지도자의 몸을 위해서만 활력을 뿜어내는 영, 그렇게 순화된 존재로 영은 도구화됐다.
프뉴마는 ‘영’인가 ‘기’인가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말년에 자신의 마지막 과업으로 성서를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미완에 그쳤고, 선생의 유지에 따라 그 일부도 공개되지 않고 폐기됐다.
어느 날이다. 그는 냉소에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프뉴마의 기막힌 번역어를 발견했어.” 모두들 궁금해하는 표정을 확인하며 선생은 말했다. “‘기’(氣)가 그것이지.” 우리 모두는 무릎을 쳤다. “아, 그렇게 하면 ‘영’이라는 번역어가 담고 있는 인격체 같은 느낌이 사라지는구나!” 영은 그리스어 프뉴마의 번역어인데, 이 단어는 ‘바람이나 숨’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루아흐’를 번역한 것이다. 바람이나 숨이 몸속에 갇혀 있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한데 영은 마치 몸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뭔가 석연치 않았다. 선생은 그것을 ‘기’라고 함으로써, 인격체와 관련된 무엇이 아니라 어떤 사건과 관련된 것, 그 흐름의 흔적처럼 보이게 했다.
그런데 선생의 다음 말에 우리는 모두 씁쓸하게 웃어야 했다. “근데 말이지, ‘하기오스 프뉴마’, 이 말이 문제야!” ‘하기오스’는 거룩하다는 뜻의 형용사다. 하기오스 프뉴마는 ‘성령’으로 번역됐다. 한데 영을 기로 바꾸려니, 성령은 ‘성기’가 되고 말았다. 이런 느낌 속에서 이 번역어는 다시 몸이 돼버린 셈이다.
그러니 ‘영’의 오독 가능성을 방어하려는 일은 여전히 대안 없는 실험으로 남겨졌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이승환, ‘구미 사태’ 후 공연 요청 줄이어…“7월까지 ‘헤븐’ 투어”
[단독] 입법조사처 ‘한덕수, 총리 직무로 탄핵하면 151명이 정족수’
[단독] ‘총선 전 계엄’ 윤석열 발언 당일 신원식, 김용현 불러 대책 논의
‘내란 비선’ 노상원 수첩에 정치인·언론인 ‘사살’ 표현 있었다
대만 전자산업노조 “삼성 반도체 경쟁력 부족은 근로시간 아닌 기업무능 탓”
북 충돌 빌미로 계엄 노린 듯…노상원 수첩엔 ‘NLL서 공격 유도’
[단독] 윤석열, 3월 말 “조만간 계엄”…국방장관·국정원장·경호처장에 밝혀
세계서 가장 높이나는 새, ‘줄기러기’가 한국에 오다니
12월 24일 한겨레 그림판
윤석열 쪽 “엄연한 대통령인데, 밀폐 공간에서 수사 받으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