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나쁜 일도 한다는 걸 너는 몇 살 때 알았어?”
얼마 전 외국 영화인가 드라마인가를 보다가 들은 대사다. 작품 제목도 생각나지 않고 대사가 튀어나온 맥락은 더더욱 오리무중인데, 유독 이 대사만큼은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아, 아이들에게 그런 순간이 있겠구나. 철이 든다고 해야 할까, 세상을 알아간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런 어느 순간에 아빠가 이런저런 나쁜 일도 하는 사람이란 걸 알아챌 수 있겠구나. 늘 자상하고 모범 시민의 전형처럼 보이는 아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악마가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은 얼마나 충격일까? 섬뜩한 느낌을 주는 대사였다. 그 뒤로는 특정 신문기사가 전과 달리 눈에 박히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청와대와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를 상대로 한 ‘성접대’ 사건으로 회사를 그만둔 태광그룹 계열사 티브로드의 전직 직원이 회사를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 및 복직 소송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직원은 “당시 성접대는 회사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이번 소송으로 큐릭스 인수를 위한 태광그룹의 로비 행태가 드러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기업형 슈퍼마켓(SSM) 롯데슈퍼가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점을 변칙적으로 기습 개점한 데 이어, 21일에도 용산구 문배동 원효로점을 기습 개점했다. 특히 원효로점은 공사 기간 동안 공사 가림막에 ‘스시뷔페 입점 예정’이라는 안내문을 붙여놓아, 인근 상인들이 “또 한 번의 꼼수 개점”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기사들을 읽으면서 태광그룹의 비도덕적 경영 행태라든가 롯데슈퍼의 비열한 업무처리 방식에 분노를 느끼는 것만큼이나, 저런 행위에 가담해야 했던 아빠들의 얼굴을 생각해보게 된다. 회사의 지시로 로비를 하기 위해 성접대를 했다는 이야기, 중소상인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SSM을 속임수까지 써가며 개점했다는 이야기를 자신의 아이에게 하지는 않았겠지. 그 아이들은 아빠가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아빠들은 뭐라고 해명할까?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고 할까? 아이들은 이해할까? 세상에서 가장 정의롭고 멋진 사람이라고 여겼던 아빠가 남들의 지탄을 받는 처지라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빠가 하는 ‘나쁜 일’로는 각종 범죄행위를 우선 꼽을 수 있지만, 꼭 범죄는 아니더라도 그 경계가 모호한 행위도 포함될 수 있고 그 밖에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행위도 들어갈 수 있다. 어둠의 세계에 속한 이들도 자기 자녀에게는 더없이 자상하고 올곧은 아빠라는 이야기가 종종 영화에도 나오지만, 그런 영화 같은 이야기 말고도 현실의 많은 아빠들이 아이들은 모르는 더러운 세상에 발을 담그고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아빠들에게 발을 더럽히게 만드는 것은 자본이라는 비인격적 존재가 아닐까 싶다.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더 벌기 위해, 그러지 않으면 나락으로 떨어지므로, 물불 가리지 않아야 하는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가 아빠들의 타락을 부추기는 배후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본의 포악한 성질을 제어해 아빠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아빠의 ‘나쁜 일’을 알아버린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아빠도 하기 싫지만 너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 것보다 위안이 덜 될 수도 있겠다. 아빠들도 아직 답을 얻지 못한 질문 아닌가.
도대체 아이들은 몇 살 때 아빠가 나쁜 일도 한다는 걸 알까? 알아야 할까?
한겨레21 편집방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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