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을 담당할 노예들이 있고, 남성 간의 성교를 해결해줄 탐스러운 미소년들이 있는데, 굳이 여자가 무슨 필요란 말인가?” 이는 고대 그리스의 한 시인이 남겨놓은 당시 그리스 남성의 집단의식을 반영하는 푸념이다. 그렇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우리가 아는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학자들은 상당수가 동성애자였다.
미국을 바꾼 킨제이 혁명인간에게는 다양한 성적 패턴과 각자가 구축해온 성의 스토리가 있다. 다만, 세상이 허락하는 방식만이 자주 표출되고, 나머지는 억압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해낸 사람은 킨제이다. 1948년과 53년 각각 발표된 인간의 성행동에 대한 보고서는 인류가 해온 많지 않은 성행동 연구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체계적인 것이다.
동물학자였던 그는 벌의 생태를 연구하면서, 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생태의 다양성도 함께 증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결혼과 관련한 강의를 맡게 된 그는 인간의 성에 대한 과학적 자료가 부족함을 절감하고 인간의 성행동 연구에 착수하고, 그리하여 1만2천 명을 인터뷰한 자료를 토대로 킨제이 보고서가 완성된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생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성교는 죄악시되었고, 동성애는 변태나 병적인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여성은 성적 흥분을 느끼지 않는다는 통념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이 성적 흥분을 느낄 뿐 아니라 25%의 기혼여성이 혼외정사를 경험했고, 37%의 남성, 19%의 여성이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적어도 한 번은 동성애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보고서를 통해 드러난다. 사람들은 나만의 은밀한 일탈과 죄스러운 경험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함께 겪던 사실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치밀하고 객관적인 과학적 사실은 그 자체로서 혁명적인 사회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동성애와 이성애가 이분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동성애 가능성과 이성애 가능성 사이의 한 지점에 있으며 그 가능성은 사회적 환경과 개인적 상황에 따라 옮겨다닌다. 기존 성에 대한 통념은 금기를 권력으로 치환하는 통치세력에 의해 날조된 것일 뿐. 킨제이 보고서는 미국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지만, 그것은 곧바로 미국 사회가 성적 억압에서 급격히 해방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는 것은 해방이며 모르면 조종당한다.
히틀러와 스탈린을 비롯한 모든 전체주의 권력은 동성애를 위험으로 간주해왔다. 그것은 성적 억압이 완화되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성은 대중을 통제할 가장 효과적인 도구였다. 킨제이의 연구도 공산당의 음모라는 공격을 받았고, 연구지원금은 차단당했다. 인간에게 그들이 다양한 성행동 패턴을 갖는다는 사실이 ‘정상’임을 알림으로써, 권력이 성적 금기를 틀어쥐고 대중을 요리하는 것을 방해한 대가였다.
광고가 정치적·정서적 억압 반영“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 책임져라” 따위의 사고가 광고가 되어 신문에 실리고, 이런 주장을 하는 단체가 있다는 것. 성적 지식, 성행동의 다양성과 관련한 우리 사회의 수준이 원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지금 한국 사회가 얼마나 정서적·정치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반영해주는 사건이다. 성적 억압이 필요한 사람들, 그 억압 속에서만 안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뜻이므로. 킨제이 보고서 이후 인간의 성행동을 설명해줄 더 치밀한 보고서는 나오지 않았고, 발간된 지 60년 된 킨제이 보고서는 우리나라에선 출간되지도 않았다. 이 나라의 권력은, 아마도 세상의 모든 권력은 인간이 성적 억압에서 벗어나길 원치 않는 건지….
목수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