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기 근무 사병 출신이다. 그 시절, 사람들은 나한테 자꾸 욕을 했다. “어이, 십팔방.” 1년6개월 출퇴근 근무를 부러워하는 ‘이-십팔’ 개월짜리 군바리들의 패악질이었다. 십팔 개월에 대한 기억은 오직 하나다. 너무 더웠다. 고향 대구는 나의 군 복무를 기다렸다는 듯, 해방 이후 최고의 더위로 인사했다. 기상관측 이래 역대 최고기온의 1·3·4·5위가 대구의 기록이다. 그중 최고는 1942년 8월1일 대구에서 기록된 40.0℃다. 그런데 1994년 7월21일, 대구는 39.4℃까지 올랐다. 그해 7·8월 동안 낮 최고기온이 30℃ 아래로 내려간 날은 딱 하루였다. 그 여름 내내, 나는 더 내려갈 곳 없는 이등병이었다.
십팔방은 밋밋한 민무늬 군복을 입었다. 현역들의 얼룩 무늬 군복에 비해 볼품 없었을 뿐 아니라, 옷감도 두꺼웠다. 끈적한 땀이 군복을 적시고 뜨거운 태양이 수분을 증발시키면 하얀 소금 자국이 녹색 소매에 선명하게 남았다. 매일 빨아 입을 수 없으니, ‘소금선’이 나이테처럼 하나둘 쌓였다.
나는 부대에서 부대로 군 문서를 전달하는 ‘전령’ 노릇도 했다. 더워서 그랬는지 더러워서 그랬는지, 사람들은 버스에 올라탄 나를 피해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어느 날, 부대로 돌아오는 길에 중국식당에 갔다. 군복에 또 한 줄의 소금선을 남기며 자장면을 먹는데, 텔레비전에 긴급 속보가 떴다. 1994년 7월9일 낮 12시, 북한 당국은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실제 사망 이후 34시간 만이었다.
유사시 곧장 최전선에 투입되어 적의 남하를 최대한 지연하는(싸우는 게 아니라) ‘총알받이’ 구실이 우리의 몫이라는 게 대구 십팔방들의 상식이었다. 그 상식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었다. 방송에선 “전군이 비상경계 태세에 들어갔다”고 했다. 땀이 줄줄 흐르는데, 팔뚝에선 오싹 소름이 돋았다. 나는 ‘최대한 오랫동안’ 자장면을 먹었다. 면발을 하나씩 집어 올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평생 자장면을 먹고 싶었다.
1994년 이후 최고 무더위로 기록될 2010년 여름, 소금기 가득한 바다에서 군인들이 전쟁 연습을 하고 있다. 동해를 거쳐 서해에서 한-미 합동 해상훈련을 하고 있다. 작전실 등을 제외하면 전투함과 잠수함 내부는 무척 더울 것이다. 시원하게 몸 씻을 물 따윈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들의 소매에도 소금선이 날마다 쌓이고 있을 것이다. 절로 욕이 나오는 내 십팔 개월을 돌아보면, 국가에 대한 충성은 잘 모르겠고 그저 전쟁이 날까 두려웠다. 나 같은 것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살육의 한복판에 끌려들어갈까 무서웠다. 저 바다의 군인들은 덥지만 소름 돋는 오싹한 여름을 어떻게 버텨낼까. 왜 이런 여름은 자꾸만 반복될까.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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