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
필자가 12년 전 어린이들 사이의 주먹다짐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한 한국 학생에게서 들은 이 말은 꼭 모든 남자아이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2001년 미국 통계를 보면, 1년에 적어도 한 번씩 주먹으로 싸워본 남학생은 43%에 그쳐 과반수도 되지 못했으며, 북유럽이나 동아시아에서는 미국보다 학생 간의 싸움을 더 보기 드물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적용할 수 없는 말을, 국가에는 그대로 적용해도 좋다.
국가는 싸우면서 자란다
국가, 특히 자본주의 국가의 성장은 전쟁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나아가 자본주의 국가로 구성되는 국제 패권 체제는 늘 대규모 전쟁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1815년 이후 유럽 열강 사이의 질서는, 영국과 러시아가 주된 승전국으로 부상된 15년간의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탄생됐다. 그 뒤로는 영국과 러시아의 식민지 쟁탈전이 19세기 세계사의 한 축이 되면서 조선의 운명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1870년대 중반부터 한반도마저 러시아 영향권에 편입될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했던 영국이 1894년 이후 당시로선 열강의 대열에 끼지도 못했던 신생 근대국 일본의 한반도 보호국화, 나아가 식민화 프로젝트를 적극 밀어주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연 일본이 혼자의 힘으로 조선을 삼켜버릴 수 있었겠는가. 1931년 이후 일본이 영미 패권에서 이탈하고 궁극적으로 1945년 패전함으로써 한반도 식민화에 대한 영미의 승낙이 취소돼 ‘해방’이 찾아왔지만, 스탈린의 홋카이도 점령, 즉 미국의 군사보호령이 될 일본의 분단 가능성을 예방하려는 미국에 의해 도리어 한반도 북반부가 러시아(소련)에 ‘양보’됐다. 이미 1870년대부터 러-영 대리전의 무대이던 한반도가 다시 지정학적 갈등의 무대로 변했으며, 그 갈등 과정에서 새로운 세계질서가 만들어졌다.
이 질서의 재미있는 이념적 특징 중 하나는, 적대 진영에 대한 종교적 색채가 짙은 악마화다. 몇 년 전 미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에서 그대로 드러난 이 특징은, 사실 부시보다 지능이 월등히 높은 서방 이념가들의 저서에서 이미 수십 년 전에 나타났다. 1930∼50년대 미국 지식계의 거목이자 노동운동의 지지자, 자칭 ‘민주사회주의자’인 라인홀드 니부어(1892∼1971) 같은 이마저도 저서 (1952)에서 한국전쟁을 ‘선과 악의 대결’로 규정하면서 “오로지 절대 권력에만 절대적으로 집착하는 공산주의적 전체주의”와의 평화적 공존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정했다. 정치적 변화에 민감한 니부어야 1960년대 중반에 들어 베트남전을 반대하고 공산 진영과의 평화적 공존을 지지하는 비둘기파로 돌변했지만, 북한에 대한 ‘절대악’의 딱지는 대다수 미국인의 인식 세계에서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미국 포로들이 반전 입장으로 돌아선 이유를 “중국군 포로수용소에서의 세뇌”라고 설명하는 에드워드 헌터 등 미국 기자들의 기사가 1950년 등에 실린 뒤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세뇌’라는 단어는 다수 미국인의 소련관과 중국관, 특히 북한관을 결정하게 됐다. 세계를 생지옥으로 만들려는 악한들의 ‘세뇌’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무수한 슬라브인과 동아시아인 무리들…. 이와 같은 ‘공산위협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다수의 미국인은 본인들이야말로 세뇌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한국전쟁 때 발표한 한 책에서 ‘공산주의적 집단주의’를 “개인을 완전히 부정하는 원시 부족의 논리”로 치부한 파울 틸리히(1886∼1965) 같은 전형적인 기독교적 자유주의 사상가는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진보’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인·운동가까지도 한국전쟁 시기에 광적인 반공주의로 돌아선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패권 제국과 반대자, 양쪽의 이성 마비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처럼 1909년부터 미국 ‘주류’의 인종주의에 맞서온 흑인 시민운동단체마저도 1950년 6월25일 전쟁이 터지자 ‘우리 안의 공산 계열 전복 분자 색출’에 나선 것을 보면, 한국전쟁 이후 반공주의가 미국 사회에서 일종의 ‘시민 종교’가 됐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서방국가들은 이 정도까지 나아가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1950년 6월25일 이후 ‘공산주의자’가 ‘악마’의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자본주의 열강의 역사는 경쟁과 전쟁의 역사긴 하지만, 열강 사이의 경쟁이 이렇게 ‘종교화’돼 경쟁국이 ‘악마’로 그려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대공황이 생생히 기억되는 시점에서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큰데다 공산 진영의 공식적 무신론에 대한 천주교·개신교의 극단적 혐오증, 그리고 슬라브인이나 동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또는 오리엔탈리즘적 편견 등이 가미됐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서구화된 제정러시아 지배층을 포함한) 서구인 사이의 ‘내전’이었지만, 1950년 이후의 ‘대공 투쟁’은 문화나 관습, 그리고 많은 경우에는 외모까지 구미 지배자와 다른 (거의 서구화되지 않은) 평민 출신의 소련 지도자나 마오쩌둥·호찌민·김일성 등 동아시아의 ‘유교적 공산주의자’를 상대로 한 ‘외전’이었다.
몇 년 전 미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 대해 “나는 그를 혐오한다” “난쟁이”(pygmy) 등 인종주의적 모멸감이 짙은 언사를 사용한 것은, 1950년 이후 미국 반공주의의 인종주의적 측면을 잘 보여준다. 지난번 대통령이 되려다 패배한 존 매케인이 전쟁 포로 시절 자신을 지켰던 베트남군 초소병에 대해 ‘구크’(gook·‘깜둥이 놈’이라는 뜻으로 미군 사이에서 사용되는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모욕)라고 표현하면서 “나는 평생 ‘구크’들을 혐오해왔다. 죽을 때까지 혐오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가 문제를 일으킨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많은 면에서 반공주의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황화론’(황색 인종이 백인을 위협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는 주장으로, 청일전쟁 말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황색인종을 억압하기 위해 내세웠다)을 그대로 계승했다. 1882년 ‘중국인 배제법’을 통과시켜 중국인의 이민을 거의 봉쇄한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황화론은 반공주의에 대한 설득력을 극대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북의 주요 도심에서 약 40∼50%의 건물을 폐허로 만든 ‘융단폭격’의 기저에 흐르는 정서 역시 인종주의로 볼 여지가 다분히 있다. 융단폭격, 저수지의 의도적 파괴, 고엽제 사용 등에 부딪친 북한이 ‘미제’에 대한 거의 종교적 혐오증을 대중화했고, 최강경의 배외적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주체사상’으로 선회한 것도, 한국전쟁의 또 하나의 큰 피해라고 볼 수 있다. 패권 제국의 ‘종교화된 반공주의’는 그 반대자의 ‘종교화된 반미주의’로 이어지는 등 양쪽에서 이성의 마비 증상이 보였다.
흑인이 선거권조차 누리지 못했던 1950년대 미국에서야 ‘치컴’(chicom·‘중국 공산주의자’의 비하적 약칭)이나 ‘구크’에 대한 종교적이다 싶을 정도의 혐오를 대중화하는 게 ‘주류’ 백인의 정서상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일제의 병참기지에서 돌연히 미국의 반중·반소·반북 전쟁 준비 기지로 바뀐 남한에서는 그 이념적 사정이 달랐다. 태평양전쟁만 해도 ‘백인’이라고 총칭될 수 있는 미·영·소와의 ‘인종적 성전(聖戰)’으로 선전됐지만, 김일성 정권을 ‘인종적 타자’로 만드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김일성 정권과의 대결을 ‘민주주의와 공산독재의 싸움’이라고 선전하는 것은 ‘사상전’의 기본이었지만, 1956년 남산의 조선신궁 자리에 들어선 이승만의 대형 동상을 응시하면서 ‘민주주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과연 그렇게 많았을까. 결국 남한에서의 반북·반공 정서 형성에는 종교가 크게 기여해야 했다.
군대에서 거의 유일사상으로 군림이미 태평양전쟁 시절에 일제의 ‘성전’에 대한 적극적인 부역 행각을 벌인 제도권 불교 집단도 얼마든지 새로운 ‘반공 성전’을 거들어줄 용의가 있었지만, 결국 반북주의·반공주의를 바탕으로 한 ‘국민 총단결’을 종교화하는 일차적 역할을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맡게 됐다.
그 배경을 보면, 두 가지 요소가 흔히 지적된다. 일면으로는 불교보다 한국 개신교의 반공주의적 ‘전통’이 훨씬 깊었다는 것이다. 이미 1930년대 중반에 히틀러에 홀린 YMCA 총무 신흥우(1883∼1959)가 기독교적 파시스트 조직 격인 ‘적극신앙단’을 만드는 등 교계 내부에서 극우 지향이 존재했으며, 길선주(1869∼1935)와 같은 인기 많은 신비주의적 교회 지도자가 공산주의를 ‘말세의 사탄’으로 지목했다. 해방 뒤 월남한 한경직(1902∼2000) 등 보수적 교회의 핵심들은 이런 ‘공산주의=악마’ 논리를 대대적으로 심화·발전시켰는데, 이북 좌파 정권과 교계 사이의 갈등이 날로 커져 지주·상인 출신의 많은 교인이 재산을 잃고 월남하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기독교적 반공주의가 교계를 휩쓸었다. 또 일면으로는, 미국의 영향하에 남한에서 이승만을 비롯한 열성 개신교도가 권력을 거의 독점해 기독교가 ‘국교 아닌 국교’의 면모를 띤 상황에서 기독교가 ‘반공 성전’의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기도 했다.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한 이승만 정권의 초대 내각에서 42%의 각료는 기독교인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념’과 ‘미국’ ‘문명’ ‘기독교’가 대체로 동의어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기독교가 대한민국의 국시인 반공과 합쳐지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냉전 최전선의 안보국가인 초기 대한민국의 핵심 기관은 군대였는데, 1950년대 군대에서 기독교는 거의 ‘유일사상’으로 군림했다. 1968년 이전까지 군대에 불교 ‘군승’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군목과 군신부 등은 미국 선교사와 한경직, 류형기(1897∼1989) 등 한국 교계 실세들의 추진으로 이미 1950년 말에 탄생했다. 1950∼64년 개신교·천주교 성직자 586명이 군종장교직을 지냈는데, 그들은 1957년에 이르러 군부대에서 249개 교회를 짓고 기독교 사병 비율을 전국 기독교인 비율의 2배 이상인 15%로 끌어올렸다. 육사·해사 등 군과 국가의 핵심 기관에서는 기독교인 사관생 비율이 아예 40∼50% 정도였고, ‘기독교 정권’으로 인식되는 자유당 정권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려는 정일권(1917∼94)과 같은 건군 초기의 핵심 인사들은 ‘군인 모두의 기독교화’를 공개적으로 부르짖었다.
반북주의보다 질긴 종교화된 반공주의엄격히 국교를 두지 않고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명기한 대한민국에서 이와 같은 발언은 ‘위헌’으로 간주될 소지가 다분했지만, 한국전쟁 시절에 남한군이 ‘십자군’으로 불리며 군가용으로 찬송가를 확성기로 튼 기억이 작용해서인지 “군인 모두가 예수를 믿었으면 한다”는 말 정도는 당연시됐다. 기독교는 반공의 기초이었고, 반공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거의 ‘국가 이념’으로 내세운 자유당 정권이 망한 지 1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초반만 해도, 교계가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고 ‘전군 복음화 운동’과 같은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었다. 그만큼 박정희 정권과 군 당국이 ‘건전한 반공 사상’으로서 기독교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교회가 애당초 ‘평화의 종교’를 자칭했던 기독교를 ‘북괴 박멸’의 이념이자 군 정신훈련 교재용으로 만듦으로써 얻은 신자들이 과연 어느 정도의 진정성을 가졌는지 많은 면에서 의심의 여지가 있다. 그러한 교회의 양적 성장의 질적 깊이에 대해 회의할 수는 있어도, 한국 교회의 기적적 성장의 한 요인으로 작용된 것이 바로 반공의 기독교화와 기독교의 반공화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전쟁을 거쳐 광적인 반공주의로 치달은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반공 용사’들의 신이 되고 경쟁 정권은 ‘적그리스도’가 된 셈이다.
반공주의와 기독교 신앙, 인종주의가 겹쳐지면서 서방 진영을 하나로 묶어버린 1950년대야 이미 ‘역사’가 됐다. 그러나 ‘문명의 적’이나 ‘문명의 타자’에 대한 종교화된 혐오증은 과연 완전히 없어졌는가. 이데올로기적으로 크게 유연화되며 경제·정치적 비중이 상당해진 중국과 러시아는 이제 파트너인 동시에 ‘잠재적 위협’으로 다뤄지지만,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상태에 놓인 미국의 1100만여 ‘불법 체류자’의 경악할 만한 상황에 대해 일언반구하지 않고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현실 이상으로 부정하는 주요 서방 언론의 이분법적 위선은 여전히 놀랍기만 한다. 한국에서는 국가가 단순무식한 1950∼60년대식 반북주의를 벗어난 지 오래됐지만, 여전히 종교화된 반공주의는 개신교라는 대한민국 영향력 1위 종교집단의 꽤나 유력한 담론으로 남아 있다. 과연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심 없이는 대한민국의 ‘국민 통합’은 불가능한가? 과연 한국전쟁의 기나긴 그늘에서 언젠가 벗어날 수 있을까?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font color="#638F03"> 참고 문헌1. 강인철, 중심, 2006
2. ‘군사정권기 한국 교회와 국가 권력: 정교유착과 과거사 청산 의제를 중심으로’ 제24호, 장규식, 2006, 103∼133쪽
3. 류대영, 푸른역사, 2009
4. 최종고, 현대사상사, 1983</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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