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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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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성’이라는 이름의 폭력

등록 2009-09-02 10:29 수정 2020-05-03 04:25

저녁 9시 정도 된 것 같다. 진찰이 모두 끝나고 소파에 앉아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피로를 풀기 위해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에 대한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내 방이 사라지더니, 곧 아파트가 사라져버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두렵게도 내 시야가 미치는 곳 어디에도 아파트 벽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스피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벽을 제거하라는 이번달 17번째 포고령에 따라…. -(마크 마조워 지음) 중에서

1934년 한 독일인 의사가 기록한 내용이다. 나치의 전체주의 체제가 개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나가던 시절이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는 유명한 종교화인 를 그린 16세기의 독일 화가다. 개인은 그야말로 사회에 종속된 하나의 나사못처럼 여겨지던 숨 막히는 체제에서 그 의사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아주 잠깐 ‘자유로운’ 개인적 취향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감시당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불이익에 처해질 수 있다는 강박이 그를 짓눌렀던 게다.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기본 전제는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삶이다. 물론 사회 전체의 필요에 따라 개인의 자유는 제한된다. 문제는 그 제한을 아무 제한 없이 무제한도로 늘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면 전체주의 사회일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라면 ‘자유의 제한에는 엄격한 잣대와 한계가 필요하다’고 답할 게 분명하다. 그 잣대와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끊임없이 사유하고 토론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알게 모르게 전체주의를 향해 걸음을 내딛고 있을지 모른다.
자유의 한계를 가늠할 때 작용하는 한 가지 대립항은 ‘민주주의·인권의 원칙 대 효율성’이 아닐까.
최근 김태환 제주도지사의 주민소환투표를 둘러싼 논란이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소수의 반대 세력에 의해 막대한 투표 비용과 행정 공백을 초래했다는 주장은 효율성의 손을 들고 있다. 주민소환제는 대의제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한 직접민주주의의 요소이며, 이는 그 자체로 민주주의 향상에 이바지한다는 점은 도외시한다. 더구나 이들은 김 지사 쪽이 “소환에 반대하면 투표장에 가지 말라”는 주장을 편 뒤 일부 동장·이장들이 투표소 앞에서 주민 투표를 ‘감시’했다는, 비밀투표라는 절대적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한 일에도 애써 눈감는다.
정보·수사 기관의 감청도 하나의 사례다. 흔히 안보나 강력 범죄 방지를 위해 감청의 한계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효율성만 따지자면 최대한 투명한, 말하자면 벽을 모두 없애버린 사회를 만드는 게 옳다. 하지만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권의 원칙을 고려하기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감청에 제도적인 통제를 가한다. 감청 대상자가 아무리 위험한 인물이더라도, 이러한 원칙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결국 얼마나 정교하고 합리적인 통제 방안을 고안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자유민주주의화 지수가 산출되는 것이다.
이번호 표지이야기는 우리가 알지 못하던 또 하나의 감청 기법을 소개한다. 그것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허용 가능한 범위인지, 어떤 제한이 필요한지, 제도적 통제 수단에는 무엇이 있을지 아직 우리 사회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토론을 촉구하는 차원에서 한 가지 급진적 아이디어를 내자면, 모든 감청을 법원의 영장에 기초하되 그 집행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담당하도록 하는 건 어떨까? 최소한 국가인권위원회에 감청 통제 권한을 주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국가기관 간에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민사회와 법조계, 학계, 언론 등이 부단한 고민의 끈을 놓고 있는 시간만큼 자유민주주의는 성큼성큼 우리에게서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난 뒤 누군가는 탄식할 것이다.

꿈을 기록한 뒤에 그 의사는 또 한 번 이 꿈을 기록한 사실 때문에 고발당하는 꿈까지 꾸었다. 이제 잠조차 사적 영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 중에서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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