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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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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 어쩌면 마지막 그림

등록 2009-06-11 16:05 수정 2020-05-03 04:25

지금 내 책상에는 방금 만든 뜨끈뜨끈한 떡케이크가 놓여 있다. 오늘 가사 실습을 한 우리 반 아이들이 가져온 것이다. 2시간의 요리 실습이 가져온 흥분으로 아이들의 뺨은 분홍색으로 물들었고, 맛있고 멋있는 결과물 덕분에 우쭐해져서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그런데 이제 몇 년 내로 이런 풍경이 학교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정부가 새로운 삽질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래형 교육과정’의 선택권

고1, 어쩌면 마지막 그림.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고1, 어쩌면 마지막 그림.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이번에는 교육과정이다. ‘미래형 교육과정’이라 명명된 교육과정의 핵심은 개별 학교의 자율적 선택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름도 멋지고 취지도 그럴듯하지만, 어쩐지 수상하다.

현재 교육과정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를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 말은 실업계건 인문계건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어느 학교나 같은 교육과정으로 시간표가 편성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래형 교육과정은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을 9년으로 축소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2012년부터 고등학교는 학교별로 교육과정을 선택해 학교마다 서로 다른 교육과정을 편성하게 된다. 2003년부터 시행된 현행 교육과정에서도 고등학교 2·3학년의 심화선택 과정은 학교별로 선택하도록 하고 있으니 그 선택의 시기를 1년 더 당기는 것 이외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인 우리 반 아이들은 대부분 생애 마지막 음악 수업과 미술 수업을 하는 중이다. 학급 일기에 우리 반의 한 아이는 이렇게 썼다. “그림이 생각처럼 잘되지 않아서 속상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 미술에 재능이 있는 다른 친구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게 내가 마지막 그리는 그림이 될 수도 있으니까.” 2학년이 되면 예체능 과목 중 체육만 남는다. 주당 2시간이다. 3학년이 되면 그나마도 1시간으로 줄어든다. 이게 선택의 결과다. 선택의 시기를 1년 더 앞당기겠다고?

이미 모든 학생들이 입시 위주의 공부에 올인하고 있는 것은 현실이고, 학교에서 입시에 쓸모도 없는 과목들을 가르치느라 영어·수학을 덜 해주니 사교육에 의존하고 있는 것도 현실인데, 학교가 맡아서 해주면 좋은 것 아니냐고 누군가는 내게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공교육이 진정 공적인 소임을 다하려면 한 사회가 바라는 인간형을 키워내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 키워내려는 인간형이 바로 우리의 미래이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바라는가?

나는 종종 옷을 만들어 입는다. 사람들은 언제 그런 걸 다 배웠냐고 묻는다. 중·고등학생 시절에 배웠다. 밥상을 차릴 때 영양소를 고려하는 것도, 몸이 뻐근할 때 스트레칭을 하는 법도 다 학교에서 배웠다. 그때 배운 것으로 평생을 써먹고 있다. 덕분에 내 삶이 조금은 더 풍요롭다.

입시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

영어·수학 공부가 해롭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지금 벌어지는 문제들이 학교에서 영어와 수학을 덜 가르쳐서 생겨나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수학 공부를 통해 수학을 사고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학생이 전체의 몇%나 될 것인가. 지금과 같은 영어 공부를 통해 영어를 실용화할 수 있는 학생이 몇이나 될 것인가. 많은 아이들이 고등학교 입학 전에 수학을 포기한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학원은 다닌다. 대놓고 포기하기에는 너무 두려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선택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것이다. 정말 선택이 선택일 수 있으려면 영어·수학 못하는 아이들도 선택할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인문계 고등학교가 영어·수학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과정을 개설할 것인가.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학교를 마친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훨씬 긴 시간이 이어진다는 것을. 그런데 오직 입시에만 매달리는 교육을 ‘선택’한 아이들은 입시 이후에는 무엇으로 삶을 풍요롭게 할까? 대체 어떤 미래를 바라기에? 미래형 교육과정은 대운하 사업만큼이나 우리 미래에 치명적이다. 차이점은 대운하처럼 눈에 띄는 문제가 아니라서 순조롭게 삽질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발 이 삽질을 멈춰줘!

박현희 서울 구일고 사회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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