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안녕? 나는 날으는(나는) 빗자루 선생님이야. 우리 반은 날으는 교실이고.”(맞춤법과 다르지만 말 그대로 옮겼다.)
초등학교 6학년 새 학기 첫날, 선생님을 처음 대면하는 자리. 스페인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처럼 원색의 목폴라를 입고 쇼트커트를 한 선생님이 교탁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말했다. 낮은 목소리, 안경 너머로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자기소개. 당시 해리 포터 세계관에 과몰입해 있던 나는 감전된 것처럼 몸이 찌르르했다. 6학년만 맡는다던 멋진 선생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꼭 이 선생님 반이 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한 보람이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였다. 이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자랐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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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년간은 꿈같은 시간이었다. 호그와트 마법학교로부터 입학 통지서를 받지는 못했지만, 내가 있는 곳이 여느 시골 학교가 아니라 하늘 위의 교실인 것처럼 즐거웠다. 5년을 다닌 초등학교 생활에 대해 알 만큼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새로웠다. 욕심과 책임감에 짓눌려 심각하던 얼굴이 먹구름 걷힌 듯 환하게 바뀌었다고 후에 부모님이 얘기해줬다.
선생님은 마냥 친절하거나 늘 웃고 있는 여성이 아니었다. 그래서 좋았다. 나는 경외와 애정, 때로는 연민의 시선으로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선생님이 수업하는 방식, 아이들을 대하거나 동료들과 소통하는 방식, 숙제를 내주고, 청소와 글쓰기를 가르치는 방식, 역사와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게 만드는 방식 등 그 모든 것이 기존에 경험했던 것과 달랐다. 관성적인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학교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것처럼 번거로운 일을 효과적으로 해치우는 방법도 알려주셨다. 그런 걸 6학년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준다는 게 이상할 수도 있지만,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용했다.
졸업을 앞두고, 한 달 내내 선생님은 반 아이들의 장점과 보완할 점에 관해 모두가 익명으로 글을 쓰게 했다. 잘 알든 모르든 친하든 아니든, 정해진 분량을 채우기 위해 저녁마다 한 사람씩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하던 시간을 잊지 못한다. 선생님은 내가 수년간 지켜보면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친구들의 장점들을 금세 찾아냈다. 그 칭찬의 기준이 어찌나 다채로운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시끄럽고, 제멋대로인 ‘문제아’들이 이 교실 안에서만큼은 진지하게 써낸 시와 그려낸 선들에 감동하고 질투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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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하는 동안, 각자의 개별적인 인격을 존중하고 치열하게 배우며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는 선생님의 다정한 눈으로 친구들을 다시 바라봤다. 다양한 친구들의 고유함을 발견하고 포용하게 됐다. 그건 나 자신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가진 여러 특성을 ‘나다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하기 시작했다. 졸업식 날, 기대하며 열어본 글 뭉치에는 솔직히 충격적인 내용도 많았지만, 아직도 떠올릴 만큼 도움이 되는 말이 많았다.(“주온이는 다른 사람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면 좋겠다”처럼)
매년 새 학년이 시작되는 봄마다 설렘을 느끼고 싶을 때면, 선생님의 자기소개 첫마디를 떠올린다. 시민들이 점점 더 극단적으로 분열돼가는 시국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타인을 만나면 그 사람을 “날으는 교실”로 초대해본다. 인간의 다면성과 변화 가능성을 이해하던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말을 걸었을까 질문하면서.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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