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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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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네가 어른이 됐을 때엔…

등록 2009-05-07 10:27 수정 2020-05-03 04:25

시영아, 며칠 전 아침에 너한테 너무 화를 냈지? 그 전날 밤 아빠는 밤늦게 퇴근했는데 배가 무척 고팠거든. 냉장고를 열어보니 초코빵이 있기에 조금 먹었던 거야. 그게 시영이가 좋아하는 빵인 줄 몰랐단다. 그렇다고 아침에 자고 있는 아빠한테 화풀이로 발길질을 하면 어떡하니. 빵을 다 먹은 것도 아닌데…. 그게 누구든 간에, 어떤 이유든 간에 다른 사람을 때리는 건 나쁜 일이야. 앞으론 안 그럴 거지?
이 글은 시영이가 세상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될 때쯤 보여주려고 해.
널 애지중지하는 엄마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기 때문에 갖고 싶은 장난감도 마음껏 가질 수 있고 벌써 영어도 배우고 놀이수학도 하고 놀러도 많이 다니지. 그런데 세상에는 너처럼 맘껏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단다. 우리보다 더 가난하거나 몸이 아프거나 심지어 엄마가 없는 친구들도 있지. (시영아,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엄마가 없다고 생각해봐.) 그런 친구들은 어떻게 해야겠니?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인권이란 게 있는데,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단다. ‘시민·정치적 권리’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라고 해. 앞엣것은 남이 나를 때리거나 함부로 가두거나 할 말을 못하게 할 수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함부로 아빠나 친구들을 때리면 안 돼.) 두 번째 것은 누구나 충분히 먹고 편안히 자고 잘 배우고 재밌게 놀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 앞엣것은 대부분 나라에서 법으로 보장하고 있지만, 두 번째 것은 그렇지 않지. 충분하고 편안하고 좋고 재밌는 게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데다, 나라마다 한정된 재원으로 그 모든 걸 보장하기는 힘들거든. 그래서 지금은 이런 것을 ‘권리’로까지 보지는 않고 ‘복지정책’ 차원에서 다루는 거지.
하지만 아빠는 그것도 궁극적으로는 ‘권리’로서 보장돼야 한다고 믿어. 다만 현실적으로 재원의 문제가 있다면 우선 시급한 부분이라도 ‘권리’의 문제로 보장해줘야 한다는 거지. 아빠가 생각하는 최고의 우선 과제가 뭔지 아니? 바로 시영이 같은 어린이들이야. 어린이들에게는 평등한 경제·사회·문화적 환경을 절대적으로 보장해야 해.
왜? 어린이들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책임이 없잖아. 어른들이라면 그동안 게으르게 살아서 또는 능력이 없어서 남들만큼 좋은 환경을 누리지 못한다고 쳐도, 시영이 같은 아이들은 그게 아니잖아. 그리고 있잖니. 지금과 같은 사회를 자본주의라고 하는데, 자본주의의 최고 덕목은 경쟁을 통한 효율성이라고 해. 그런데 경쟁이란 건 똑같은 조건에서 출발해 누가 더 열심히 노력하는지에 따라 보상을 달리 해준다는 뜻이야. 모두에게 평등을 보장해주면 사회가 발전하지 않으니 경쟁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아저씨들이 많지. 그런데 그런 생각이라면 정말 공정한 경쟁을 하도록, 출발선에 나란히 서서 출발하도록 해줘야 하지 않겠니. 출발점부터 다르다면 그건 진정한 경쟁도, 자본주의도 아니라는 게 아빠 생각이야. 그러니 결식아동 ‘지원’이란 말은 틀린 거지. 잘 먹이지도 못했다면 나라가 미안해해야지.
그래서 아빠는 섭섭한 게 있어. 우리나라에 어린이들을 위해 일하고 연구하는 선생님들이 많거든. 그분들이 으쌰으쌰 운동을 했으면 좋겠어. 너무나 불공평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이 많다는 걸 잘 아시는 분들이라면 그냥 공부만 하거나 몇몇 아이들을 돕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 되겠거든. 그러니 무슨 단체나 정당이라도 만들어서 어린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평등한 출발’을 보장해주자는 운동을 했으면 좋겠어. (그 평등한 출발선이 어느 수준이어야 하는지는 시영이가 이 글을 읽을 때쯤 더 많은 논의가 진행돼서 구체화됐으면 좋겠다.)
그래, 시영이가 이 글을 읽을 때에도 그런 움직임이 없다면 우리 시영이가 한번 나서보면 어떨까. 그거 아니? 우리 사회에 많은 소수자 그룹이 있지만, 그중에서 국회에 자신들의 대표를 보낼 수 없는 유일한 그룹이 바로 어린이들이라는 거. 가장 약하면서도 독자적인 목소리는 낼 수 없는. 그러니 어린이들을 위한 사회를 만드는 정당을 만드는 거야. 이름하여 ‘어린이사회당’. 이름도 예쁘지? 창당 자금은 허투루 돈 많이 쓰는 재벌 할아버지들한테 좀 내놓으라고 해도 돼. (대가성은 없어야 한다.^^)
사랑하는 시영아, 이 글을 읽을 때쯤 아빠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의젓한 아이였으면 좋겠다. 초코빵 때문에 아빠가 막 화낸 거는 정말 미안.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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