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악법 저지를 위해 언론노조가 총력투쟁을 선포한 3월2일, 서울 여의도 투쟁 현장에 섰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하면서 기자로서의 사명감에 몸을 떨었다. 그러다가, 사건은 너무 생뚱맞게 벌어졌다.
잠시 화장실에 갔다가 대열에 다시 합류하려는데 한 남자가 갑자기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산업은행이 어디예요? 제가 앞을 못 봐서 그러는데 좀 데려다주세요. 화장실이 급해요.” 시각장애인이었다. 도와줘야겠다 싶어 함께 걷기 시작했다. 팔짱을 꽉 끼고 있는 그가 부담스러워 물었다. “보통은 팔꿈치를 잡으시는데 팔짱을 끼시네요?” “팔꿈치 잡으면 이상해 보이잖아요.” 팔을 뺄 수도 없고 난감했다.
그의 태도는 점점 이상해졌다. “아는 누나에게 구두를 선물하려는데 당신 구두 굽은 어느 정도나 돼요?” 그는 구두 소리를 듣고 일부러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난 낮은 구두를 신었는데 선물을 하신다면 그분에게 맞춰야지 나랑은 상관없는 얘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구두 얘기만 하다가 화장실에 도착하자 “소변만 보고 올 테니 몇 초만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왜소한 몸, 퀭한 두 눈을 보며 차마 거절을 하지 못했다. 돌아가는 길도 복잡하니 도와줄 수밖에, 라며.
그는 화장실 안에서 끙끙대며 일을 치렀다. 민망해서 화장실 입구에서 몇 걸음 걸어나왔다. 그러자 허리춤도 추스르지 않은 채 그가 황급히 화장실에서 나왔다. 구두 소리가 멀어지자 막 뛰어나온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내 팔에 자신의 팔을 꽉 끼웠다.
건물을 나오자 그는 “난 볼 수 없으니 이렇게 해야 구두 모양을 알 수 있다”며 갑자기 몸을 숙여 내 구두를 더듬더니 발을 만지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냐. 발을 왜 만지냐”며 발을 빼려 하니 그가 두 손으로 발을 움켜쥐었다. “구두를 보고 싶으면 구두만 보라”며 구두를 벗어던졌다. 그는 “발을 빼지 말라”며 발을 잡았다. 발과 구두에 페티시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다 왔으니 알아서 가라”며 도망가려 하자 그는 다시 내 발을 잡았다. 스타킹밖에 신지 않은 발 위로 끔찍한 손가락의 꾸물거림이 느껴졌다. 그를 밀치며 행여 구두 소릴 듣고 쫓아올까 싶어 허둥지둥 뛰었다. 그는 나를 향해 나지막이 욕을 내뱉었다.
방금 전까지 사명감에 불타는 ‘기자’였다가 금세 성추행을 당한 ‘여성’이 됐다는 비참함이 엄습했다. 어디론가 가서 발을 씻고 싶었다. 주변엔 경찰도 많고 언론인도 많았지만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밀려왔다.
여기까지만 상처가 될 줄 알았다. 한데 상처는 날이 갈수록 커졌다. 성추행을 당하고 많은 얘기를 들었다. 고작 발 정도 만진 걸 갖고 그러냐는 눈빛으로 “발만 만지고 말았으면 됐지”라고 말하는 사람, “그걸 왜 그냥 뒀냐” “이름이라도 알아오지 그랬냐”며 무대응을 탓하는 사람, “그러게 왜 과잉 친절을 베푸냐”는 사람까지. 성추행에 놀라고 주변 반응에 위축된 채 온전히 일주일을 끙끙댔다.
성추행 피해자이면서도 주변의 반응에 더 부끄러워하며 지내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전문 상담기관을 찾았다. 우선 여성긴급전화 1366에 전화를 했다, 상담원은 “생각도 못한 사람이 (성추행을) 그렇게 하는데 충격받은 상태에서 하지 말라는 말밖에 뭘 더 할 수 있겠냐. 증거를 남기고 신고하는 건 나중 문제다. 우선 상담을 받으라”며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02-739-8858)를 연결해주었다. 상담 시간이 회사 업무 시간과 겹치니 점심시간을 이용해 상담하려고 점심도 먹지 않고 배회하다가 아무도 없는 수유실에 숨어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상담은 사건 발생 나흘 뒤, 오후 1시 언저리에 이뤄졌다.
“당신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하고 나온 거다. 그 사람을 배려하다가 당했고, 발을 만지는 순간 그 상황이 잘못됐다는 걸 인지했다. 그리고 스스로 불쾌감을 추스릴 수 있도록 행동했다. 성적 불쾌감을 느낀 순간에 그 상태를 벗어나려고 노력한 것은 아주 당연한 대응이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 때 자신을 오픈한 상태가 되는데 이 상황에서 공격을 받으면 공황 상태가 된다.” 상담자는 우선 내가 겪은 사건에 대한 지지의 말을 건넸다.
“성폭력 대처 요령이란 건 정답이 없다. 이런 문제에는 자기 느낌을 신뢰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그것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쉽게 말하고 대처 방법 운운한다는 것은 성적 감수성이 없어서 일어나는 문제다. 상담을 하고 있는 나조차도 성폭력 상황에서 어떠한 대처도 못해 자괴감을 느낀 적이 많았다. 어떻게 대응하면 내 기분이 좀더 나아질까 싶어 훈련한 결과 이제는 욕 한 마디, 주먹질 한 번은 하게 됐다. 내가 그게 마음 편하기 때문에 선택한 거다. 만일 자신이 주먹을 휘두르고 마음이 불편하면 그건 정답이 아니다. 성폭력 앞에 ‘감성에 휘둘리지 말고 이성적으로 처리하라’는 말은 말이 안 된다.” 주변 반응에 더 상처받고 있던 내 마음에 위로가 내려앉았다.
“믿고 도와준 사람이 성희롱을 하고, 믿었던 동료들은 대처 방법이나 운운하니 분노와 배신감이 커 괴롭겠지만 냉정해져라. 현재 주변 사람들은 전혀 지지나 위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아쉽지만 그걸 가르쳐줘도 모를 가능성이 크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정말 좋은 생각이다. 꼭 써라. 쓰면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해 나중에 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하면 내 기분이 좀더 나을까 고민하면 더 성장할 수 있다. 어떤 게 정답인지, 그런 건 없다.”
성폭력상담소 게시판에는 ‘2차 가해’라는 말이 있다. ‘1차 가해’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행한 직접적 가해, ‘2차 가해’는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시선이나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로 인해 피해자에게 또 다른 피해를 주는 것을 말한다. 상담을 받고 비로소 숨을 쉬었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건네야 한다고 상식처럼 외운 말을 이제야 스스로에세 건네본다. “네 탓이 아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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