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지 정확히 1년째 되는 2월25일이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문방위) 고흥길 위원장이 기습적으로 의사봉을 두드렸다. 언론 관련법 22개가 무더기로 상임위에 상정되는 순간이었다. 고 위원장의 타봉 소리는 ‘이명박식’ 속도전, 혹은 제2차 입법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한나라당과 청와대가 이 싸움을 통해 얻으려는 것은 뭘까? 당청 지도부는 두 가지 논리를 되풀이하고 있다. 언론 관련법이 통과돼야 대기업이 곳간에 있는 자금을 푼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기업 투자가 시작되면 일자리가 만들어져, 경기가 선순환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국회 예산정책처가 “(언론 관련법의) 경제적 파급효과는 제한적”이라는 분석을 제기함으로써 다시 거론하기 민망스럽게 됐다.
남은 것은 두 번째 논리, 즉 ‘정권이 바뀐 만큼 새 정부가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주장이다. 이 말은 곧 언론에 대한 이명박 정부, 좀더 정확히는 이명박 대통령의 철학을 보여줄 수 있는 열쇳말이다. 언론계에서는 언론 지형을 자신들의 이념과 노선에 맞게 인위적으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김서중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이는 이명박 정부가 지금의 방송 체제나 방송의 보도 행태를 장애물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라며 “자신들이 추진하는 정책과 반대되는 방향의 보도를 했다고 해서 방송의 일방적인 변화를 주장하고 관철한다면 그것이 곧 독재”라고 말했다.
언론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기본 철학은 3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79년 3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현대건설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때 현대그룹은 라이벌 삼성과 재계 1위 자리를 놓고 치열한 선두 경쟁을 벌였다. 갈등이 심해진 것은 삼성이 와 동양방송을 싸움에 동원하면서였다. 이 대통령이 당시 삼성 쪽에 했던 말은 이렇다. “많은 사람들이 재벌의 언론 소유를 비판하지만, 저는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삼성이 언론을 가지면 그만큼 기업을 이해하는 언론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눈길이 가는 장면은 당시 이 대통령이 재벌의 언론 소유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이유가 ‘기업을 이해하는 언론’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그의 자서전 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한나라당과 청와대가 밀어붙이는 언론 관련법이 문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동안 금지했던 대기업과 재벌신문의 방송 진출을 허용하는 것이 언론 관련법의 핵심 내용이기 때문이다. 언론 관련법 가운데 방송법 개정안은 대기업과 재벌신문이 케이블 채널은 물론 지상파 방송사에도 진출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신문법 개정안은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허용하고 있다. 마음먹기에 따라 ‘재벌방송’과 ‘조·중·동 TV’가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다.
방송과 언론 지형이 대기업과 수구 언론을 중심으로 재편된다면 이명박 정부로서는 천군만마를 얻는 결과가 될 수 있다. 대기업과 수구 언론의 이해관계는 이명박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부를 이해하는 방송’의 출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방송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인식은 전병헌 민주당 의원이 2월25일 공개한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 업무보고 자료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공공 분야 전문 콘텐츠 수요조사’라는 이름의 보고서에 따르면, 방통위는 지상파 방송 등을 이용해 정부 각 부처의 홍보 프로그램을 내보낼 계획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한국방송에 정부 홍보쇼를 만들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영어몰입·민영 상수도 홍보 방송 계획방통위는 실제로 2월부터 정부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을 대상으로 희망 프로그램을 접수했다. 그 결과 기획재정부와 교육과학기술부, 외교통상부 등 중앙 부처로부터 51건, 지방자치단체로부터 13건, 공공기관으로부터 42건 등 모두 106건의 홍보 기획안이 쏟아졌다.
기획안 내용도 정부 정책에 대한 일방적 홍보나 낯 뜨거운 자화자찬이 많았다. 실제로 기획재정부의 ‘공기업 선진화’ 관련 프로그램 기획안을 보면, “새 정부 출범 이후 몇 차례 (공기업 선진화) 밑그림을 발표했지만 추진 단계에 들어가면 국민들의 요금 상승 불안감, 지방자치단체와 지방 언론의 반발 등으로 개혁 동력이 고갈될 우려”에서 기획됐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이명박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하다 지난해 촛불 정국 때 역풍을 맞은 상수도·의료 민영화 등을 암시한 대목으로 보인다. 역시 기획재정부가 기획한 ‘녹색 뉴딜 정책’ 관련 프로그램에서는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녹색 뉴딜의 시급성과 당위성을 강조”한다고 돼 있다.
이 밖에도 교육부는 영어 몰입교육에 대한 비판 여론을 무시한 ‘영어교육 정책’ 홍보를 기획했다. 법무부는 ‘법질서 바로세우기 운동’ 홍보를 계획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기획 의도에는 “법질서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확산”한다고 돼 있지만, 용산 철거민 참사 등에서 볼 수 있듯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를 정당화하는 일방적 홍보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정부 자화자찬에 기금 40억 투입 예정”무엇보다 문제는 방통위가 방송발전기금을 미끼로 지상파 방송사 등에 프로그램 제작 압력을 행사할 우려가 있다는 사실이다. 방송발전기금은 매년 각 방송사가 공익적 프로그램을 기획한 뒤 제작비 형식으로 지원받던 돈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거꾸로 정부가 정권 홍보 프로그램을 기획해 방송사에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정부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기금을 나눠주지 않겠다’는 식이다.
전병헌 의원은 “방통위는 175억원 규모의 방송 콘텐츠 제작지원 사업비 가운데 40억원의 예산을 정책 홍보 프로그램 제작에 사용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며 “방송발전기금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은 기금의 원래 목적을 완전히 도외시한 행태”라고 지적했다.
재벌이 언론을 가지면 그만큼 재벌을 이해하는 언론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을 자서전에 기록해놓은 이명박 대통령과, 방송발전기금을 활용하면 지상파 방송에 정권 홍보 프로그램을 만들게 할 수 있다는 방통위의 발상은 닮았다. 언론 관련법이 위태로워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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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위가 기획한 ‘공공 분야 전문 콘텐츠 지원’ 사업의 문제는 뭔가.
=방통위가 방송발전기금을 미끼로 정권 홍보용 프로그램을 제작하려 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방송발전기금은 그렇게 쓰라고 있는 게 아니다. 방송사가 자율적으로 창작하고 편성한 프로그램을 방통위가 심의해서 지원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방송사를 규제·감독해야 하는 방통위가 이를 당근으로 내걸고 방송사에 정권 홍보 프로그램을 제작하라고 지시한다는 발상 자체가 방통위가 임무와 목적을 완전히 망각했다는 증거다. 거의 ‘막가파’ 수준의 정권 홍보욕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사안과 언론 관련법은 어떤 관계가 있나.
=직접적 관계가 있다. 언론악법이 통과되면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방통위가 방송발전기금을 활용해 방송사에 정권 홍보 프로그램을 제작하라고 일일이 지시할 필요가 없게 된다. 말 그대로 ‘알아서 기는’ 방송이 등장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언론 관련법 강행 처리를 시도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나.
=사실 문방위 민주당 간사인 나를 포함해 복수의 채널로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부 진전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느닷없이 ‘전쟁’을 도발했다. 한나라당이 자신들 입맛에 맞는 뉴스를 내보내려는 욕망에 눈이 멀어 스스로 이명박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분탕질했을 뿐 아니라, 민생을 내팽개친 결과가 됐다. 한나라당이 강경론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한나라당이 언론 관련법을 강행 처리할 경우의 대응은.
=그렇게 된다면 이명박 정권은 앞으로 남은 4년간 국민들의 폭발적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민주당도 총력투쟁할 수밖에 없다. 4월 국회는 물론 향후 모든 국회에서 대화와 타협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국민들의 지지는 우리 쪽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맞서겠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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