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은 물론 우리 헌법과 형사소송법은 진술거부권의 보장을 규정하고 있으며, 이 권리를 강하게 보장하는 판결도 여럿 내려진 바 있다. 그렇지만 실제 수사 과정에서 이 권리를 행사하는 시민은 많지 않다. 진술거부가 수사기관의 성미를 돋워 이후 적용법조가 자신에 불리하게 될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또는 수사 초기에 진술거부의 의사를 표시하더라도 신문 자체는 중단되지 않기에 계속되는 신문에 지쳐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해버리기 때문이다.
과거 영국의 철학자 벤담은 “무죄자는 발언의 권리를 주장하는 반면, 유죄자는 묵비의 특권에 호소한다”라며 진술거부권을 조롱했는데, 왜 모든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진술거부권을 보장하고 있을까? 수사기관에 협조해 자백을 하라고 권하지는 않을망정 오히려 수사를 ‘방해’하는 진술거부 권리를 시민에게 주는 이유는 뭘까?
대부분의 형사피의자는 신문실에서 자신의 자백을 획득하기 위해 모든 기법을 구사하는 국가형벌권과 홀로 맞닥뜨리게 된다. 수사기관으로서는 피의자의 자백을 받는 것이 이후 수사와 공소 유지를 위해 제일 편한 일이기에 이에 집착하게 된다. 수사기관이 고문·폭행·협박을 하는 경우는 사라져가고 있지만, 불법·부당한 이익 제공을 약속하며 자백을 획득하려고 하거나, ‘피해자가 당신을 지목했다’, ‘공범이 이미 자백했다’, ‘당신의 범행에 대한 목격자가 있다’, ‘당신의 범행을 입증하는 물증이 발견됐다’ 등의 거짓말을 하면서 자백을 종용하는 경우 등은 여전하다.
요컨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재정적 여건이 되지 않는 시민이 수사기관에 의해 연행되고 신문을 받는 상황에서 진술거부권은 그 시민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패다. 이 권리를 무시하는 수사기관은 불법을 범하는 것이며, 이 권리에 무지한 시민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다.
조국 한겨레21인권위원·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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