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piao@hani.co.kr
그해 유월은 불안과 설렘이 반분하고 있었습니다. 대기는 습기를 잔뜩 머금었고 거리에 나서면 끈적한 땀이 배었습니다. 가슴이 뛰고 또 두려웠습니다. 대학 새내기는 난생처음 불법의 거리에 뛰어들어, 낯익으면서도 낯선 것임을 알게 된 단어, 민주와 자유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근처 어딘가에 서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름도 생소해진 페퍼포그차가 지랄탄을 뿜어대며 우리들 한가운데로 밀고 들어왔을 때 말입니다. 제대로 들이마신 지랄탄 연기는 정말이지 호흡기관과 소화기관 모두를 뒤집어놓았습니다. 눈도 뜨지 못하고 숨도 제대로 못 쉬며 구역질을 해대는데, 군홧발 소리는 점점 다가왔습니다. 바로 그때 당신이 팔을 잡아끌었습니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뒤에도 눈은 떠지지가 않아 끝내 당신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손수건을 건네 눈물과 콧물을 닦게 하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진 당신의 뒷모습도 간직하지 못했습니다. 그 손수건이 그냥 하얀색이었는지 꽃무늬가 들어간 것이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쫓고 쫓김의 연속이었던 그 거리 인파 속에서 놓쳐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고백하건대, 이후에도 최루탄 자욱한 유월의 거리로 나를 거듭 불러낸 건 당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독재에 신음하는 민중의 이야기는 항쟁에 참여할 당위성을 일러줬지만, 첫 거리시위에서 각인된 공포를 떨쳐낼 용기까지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에 붙잡혀 무참히 짓밟힐 수 있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생면부지의 ‘동지’를 부축해주던 당신의 손길은, 그 거리에 ‘사람’이 있음을 알게 해줬습니다. 민주와 자유라는 추상을 뛰어넘는 촉각의 깨침. 다시 나간 거리에서 구멍가게 주인들이 힘내라며 건네주던 빵과 음료수, 연도의 시민들이 쳐주던 박수 소리와 택시·버스기사들의 경적시위 소리, 낯선 얼굴이 건네던 하얀 격려의 미소들은 또 다른 구체적 감각들로 민주와 자유의 공동체를 그려 보였습니다.
이제 다시 유월입니다. 심술궂은 빗줄기 속에서도 촛불은 타올라 6월10일 그날을 맞고 있습니다. 흔적도 없이 흩어졌을 당신의 손수건은 다시 살아나 1987년 6월과 2008년 6월을 잇는 시간 터널이 됩니다. 오늘도 거리에서 사람들은 처음 보는 이들끼리 반갑게 인사하고, 누군가 가져다놓은 물과 김밥을 나눠 먹으며, 의료봉사단이 꾸려지고, 경찰의 폭력에서 서로를 보호해줍니다. 물론 박수를 쳐주고 하얀 미소도 던집니다. 서울시청 앞 광장의 난장 축제에서도, 광화문 거리의 경찰 차벽 앞에서도.
시간 터널은 더 멀리 연장됩니다. 5·18항쟁으로, 4·19혁명으로, 3·1운동으로…. 시간을 관통해 거리에서 우리가 느낀 그것은 불의에 대한 저항을 가능케 하는 힘, 아니 오히려 저항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바로 연대의 감격입니다. 그리하여 “發光體(발광체)처럼 절로 빛나는 얼굴들 하고/ 젊은이는 무등 태우고 늙은이는 서로 업고/ 어린이는 꽃 갓끈 빛난 신 신겨 앞세우고/ …/ 十方(시방)으로 큰 우레 소리 두루 내는 강처럼/ 흘러들고 흘러나오”(황지우 ‘화엄광주’)는 사람들이 꽃으로 빛나는 세상을 이룹니다.
하얀색인지 꽃무늬인지 지금도 궁금한 그 선물을 제게 준 당신, 필시 나보다 선배였을 터이니 이제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자녀가 있겠습니다. 수만 개 촛불이 불 밝힌 화엄 서울, 그 거리에 아이 손목을 잡고 나온 저 엄마들 가운데 당신은 서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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