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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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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생활] 어느 날 광화문

등록 2008-06-05 00:00 수정 2020-05-03 04:25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어느 날 광화문. “한국 사람들 정말 웃기다니까!” 한국 사람이 한 말이다. 비웃느라고가 아니라 재밌어서 한 말이다. 보수 언론사 앞에서 촛불 행진하던 무리가 “불 끄라”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다. 작은 소리는 점점 커져 소라똥 앞 청계천 광장을 채운다. 누가 또 외친다. “전기세가 아깝다.” 그 소리에 다들 키득거리면서 다 같이 외친다.

‘평상어’가 구호로 등장했다. 길거리의 사람들에게도 서슴없이 건넨다. ‘동참하라’ 대신 ‘함께해요’라는 권유형으로. 전경들에게도 외쳐준다. “전경들도 함께해요.” 한 여고생은 연단에 올라 “뒤로 돌아서 말을 하더라도 용서해달라”고 한 뒤 “전경들은 우리들과 함께해오셨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죽 같이하실 거죠?”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유모차를 끌고 온 아주머니들이 시위에 앞장서자 구호는 “아이들을 지켜주자”가 주도했다. 광화문 인근을 가득 메운 전경들을 보자 “전경들을 지켜주자”로 바뀌었다. 무리와 분리되어 곳곳을 배회하던 100여 명의 그들은 아주 느렸다. 군중이 빠져나간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콰르텟의 공연장 앞에서 걸음도 멈추고 ‘귀를 기울이듯’ 조용하다가 누가 ‘왼쪽으로 안 가세요’ 하자 느릿느릿 움직였다. 2차선 건널목 앞에선 빨간불에서 멈추었다.

무리지어 있는 전경들 앞에는 한 사람씩 붙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여성은 조근조근 말하는 게 ‘전도’하는 사람 같았고, 한 아저씨는 “여기서 운전병 해본 사람? 없어? 뭐야~” 하는 것으로 보아 이야기가 길어져 잡담으로 변한 것 같았고, 한 아저씨는 “여기서 뭐하는 거야!” 하며, 앉아있는 무리들 옆에 혼자 서 있던 경찰을 향해서 돌진했다. 몇몇이 벌떡 서서 막아냈다.

청계천 인공호수에 앉아보았다. 인공호수가 시작되는 부분은 대리석이다. 빤질빤질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빌딩숲의 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좋다. 도로에 앉아보았다. 한 번씩 앉아주면 거리가 깨끗해질 것 같다. ‘아이스케키’ 파는 아저씨도 ‘FTA 재협상’ 정도는 외쳐주어야 좀 팔린다. 격투가 벌어지는 날에는 인도를 막아선 고개 숙인 전경들을 향해 이런 구호도 외쳐주고 싶다. ‘앞사람과 프리허그’. 여러 날의 광화문, 청계천,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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