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은하 〈매거진t〉 편집장
한동안 에서 ‘영화기자’라는 직함을 달고 살았지만, 영화는 나에게 단 한 번도 만만한 장난감이었던 적이 없다. 어린 시절, 당시 나름 ‘얼리어답터’셨던 아버지가 일본에서 사오신 건 가정용 베타 비디오 플레이어였다. “이제 베타의 시대가 온다.” 하지만 그의 호언장담과 달리 대한민국은 이 땅이 ‘VHS’의 나라임을 선언했고, 결국 우리 집 아이들은 사춘기 여드름 분포 속도로 확산돼가던 비디오가게(VHS 비디오만 취급하던)의 은총에서 제외됐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영화는 장가간 옆집 미남 오빠처럼 가끔 훔쳐보지만 결코 나의 것이 될 수 없는, 안타까운 짝사랑이었다.
어떤 이별가보다 슬펐던 애국가

홍금보와 주윤발을, 소피 마르소와 브룩 실즈를 손쉽게 가정에서 만날 수 있던 동네 친구들과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짓은 비디오 공테이프에 드라마를 녹화해서 한 5만 번쯤 돌려보는 것이었다. 한국방송과 문화방송만 있던 시절, 결국 나는 그 주에 방송된 모든 드라마의 대사를 달달 외우는 어린이가 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작은 수상기는 세계였고 교과서였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주는 유모였고 선생님이었다. TV는 가끔은 케빈 같은 남자친구의 모습을 하고 나무 아래에서 떨리는 내 손을 꼭 잡아주었고, 빨강머리 앤 같은 여자친구가 되어 마차를 타고 한껏 수다를 떨어주었다. 쥐를 삼키던 〈V〉의 다이애나 때문에 불면증이란 게 뭔지를 알게 되었고, 을 보며 그래도 대학은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춘기’를 함께 보내주었고,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지도 알려주었다. 그래서 모든 쇼가 끝나는 자정의 애국가는 그 어떤 이별가보다 구슬펐다. “무우궁화 사암천리~.” 휘황찬란한 색깔로 활발하게 움직이던 브라운관이 먹빛으로 변하는 순간, 나는 세상으로 향하는 출구가 닫혀버린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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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이제 안녕을 고하는 애국가 따위는 없다. 21세기의 TV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모습을 하고,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채널로 유혹해댄다. 한국뿐 아니라 ‘미드’에 ‘일드’에 각종 리얼리티 쇼들까지 양적으로 질적으로 최대, 최상의 시대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TV는 ‘엔터테인먼트 카스트 제도’의 가장 아랫단에 있는 것처럼 취급되기 일쑤다. TV 드라마에 대한 최상의 칭찬은 늘 ‘영화 같은 화면’이지만 사실 아름다운 화면은 영화라는 ‘장르’가 가진 미덕은 아닐 것이다. 미장센은 시네마스코프의 장대한 스크린이건, 할아버지 집의 14인치 수상기에서건 어디서나 빛난다.
드라마로 유명세를 얻은 배우들이 첫 영화를 찍고 “이제 드라마는 안 찍어요. 영화배우라고 불러주세요”라고 하는 걸 종종 들을 수 있다. 회당 몇천만원의 드라마 출연료를 받고도 “드라마 홍보할 여유는 없다”며 손사래를 치던 어떤 이는 영화제 레드카펫을 향해서는 비 속에서도 드레스를 챙겨입고 달려간다. 이 실체를 규정할 길 없는 ‘영화인’이라는 배지를 달기 위한 근거 없는 욕망은 다소 촌스럽게까지 느껴질 정도다.
공식적인 커밍아웃, 오래 묵혀둔 러브레터
사실 이런 TV에 대한 천대는 과거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최근은 오히려 역전된 상태다. 영화제작자로 유명한 제리 브룩하이머나 스티븐 스필버그가 〈CSI〉 시리즈나 등으로 TV의 르네상스 시대를 연 이후, 매해 열리는 에미상 시상식은 아카데미상 이상의 즐거움과 무게를 더해가고 있다. 영화는 고급스러운 것, TV는 천한 것이라는 한국 사회의 인식이나 평가는 지금처럼 다양한 방향으로 확장되고 실험되는 TV라는 미디어에 대한 고민을 정체시키고 퇴보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코 영화와 TV는 경쟁 상대가 아니다. 그것들은 각자 다른 방식과 다른 가치로 존중받아야 하는, 21세기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친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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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TV잡지 편집장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나는 영화를 사랑한다. 가 주는 가슴 먹먹한 위로와 이 주는 따사로운 휴식에서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누군가 유치한 어른처럼 “TV가 좋아, 영화가 좋아?”라고 묻는다면 어쩔 수 없이 TV의 손을 굳게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TV는 평생 동안 나를 지켜봤다. 그녀는 나를 키웠고 나를 만들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TV는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부끄럽지 않다. 이 글은 TV를 향한 나의 공식적인 커밍아웃이며, 가장 오래 묵혀둔 러브레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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