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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도 전국체전 출정을 서두르시오

등록 2007-10-19 00:00 수정 2020-05-03 04:25

베이징 행 열차 타는 남북 응원단, 이북5도도 어서 전국체육대회 합류하길

▣ 신명철 편집위원

“(베이징까지) 어떻게 오셨습니까.” “평양에서 렬차 타고 왔습네다.” 1990년 9월 베이징에는 김일성 배지를 단 북한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9월22일부터 10월7일까지 벌어진 제11회 아시아경기대회에 온 북한 응원단이었다. 베이징 대회에서 처음 열린 남북 경기인 소프트볼 구장에서 만난 한 여성 북한 응원단원은 평양의 기업소에서 일하는 사무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 뒤 여러 경기장에서 만난 북한 응원단 가운데에는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와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때 한국의 스포츠팬에게 널리 알려진 평양음악무용대학 학생도 있었고 청진사범대학 학생도 있었다. 중국은 북한과 이웃이기도 하고 혈맹 관계이기도 하다. 철도와 육로로 연결돼 있어 굳이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얼마든지 왕래할 수 있다. 대규모 응원단을 파견할 만했다.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전조선종합경기대회’로

10월4일 발표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 가운데 여섯째 항에는 “남과 북은 2008년 북경(베이징) 올림픽 경기대회에 남북 응원단이 경의선 열차를 처음으로 이용하여 참가하기로 하였다”는 문구가 있다. 이 합의가 제대로 이뤄지면 내년 8월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에 탄 남쪽 응원단은 개성을 거쳐 평양에 도착해 같은 숫자의 북쪽 응원단을 태우고 신의주와 단둥을 거쳐 베이징으로 가게 된다.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때는 각자 태극기와 인공기를 흔들며 어설프게 공동응원을 했다.

제88회 전국체육대회가 10월8일부터 14일까지 빛고을 광주에서 열렸다. 전국 16개 시도와 16개 해외지부에서 온 2만여 명의 선수단이 출전한 이번 대회의 개회식은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펼쳐졌다. 2003년 전라북도가 개최한 제84회 대회 개회식이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데 이어 두 번째로 종합운동장이 아닌 축구 전용 구장에서 전국체전의 개회를 알렸다. 선배 체육인들은 축구 전용 구장에서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이 열릴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광주시는 2008년 제89회 대회 개최지인 전라남도(주 개최지 여수)와 종목별 경기장을 나눠 쓰는 등 알뜰하게 대회를 준비했다. 사격·사이클·요트·조정 등은 전남 지역 경기장을 무상으로 사용하고 전남 대회 때 광주에 있는 야구·승마 경기장을 전남이 쓰도록 했다. 전국체국대회는 한때 각 시도에 떠맡겨지다시피 했다. 그러나 이제는 3, 4년 뒤 개최지가 예약돼 있을 정도로 인기 상품이 됐다. 개최 시도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그만큼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전남 대회에 이어 2009년 제90회 대회는 대전시, 2010년 제91회 대회는 경상남도(주 개최지 진주)에서 각각 열린다.

전국체육대회는 1920년 7월13일 조선체육회가 창설된 뒤 첫 행사로 그해 11월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본격적인 종합경기대회로 전환한 것은 조선체육회 창립 15주년을 기념해 야구·축구·육상·농구·정구의 5개 종목 경기가 열린 1934년 제15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 때부터다. 그러나 1948년 제29회 서울 대회까지는 대회 횟수만 기산돼 있을 뿐 구체적인 전적은 남아 있지 않다.

1945년 10월27일부터 31일까지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26회 대회에는 ‘자유해방 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라는 긴 이름이 붙었다. 육상 등 9개 종목이 열린 이 대회 축구 종목에는 일반부 24개 팀과 중학부 22개 팀이 출전해 성황을 이뤘다. 이때 중학부는 고등학교 과정을 포함하고 있었다. 전국체육대회는 1940년부터 1944년까지는 일제가 일으킨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으로 열리지 못했다. 한국전쟁의 여파로 1950년 제31회 대회가 개최되지 못했으나 1951년 제32회 대회와 1952년 제33회 대회는 전쟁의 와중에도 각각 전라남도(광주)와 서울에서 벌어졌다.

경상도가 서울시의 17연승 막은 ‘사건’

서울은 전국체육대회 전적이 제대로 정리된 1952년 제33회 서울 대회부터 1967년 제48회 서울 대회까지 16연속 종합 우승을 차지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그 무렵 서울시가 갖는 특별한 위치를 알려준다. 1968년 제49회 서울 대회에서 경상북도가 서울을 제치고 종합 우승한 것은 당시 체육계에서는 ‘사건’이었다. 그 무렵 전국체육대회는 그해 최고의 체육행사였다. 전국체육대회 종합 순위 시상식 사진이 신문의 1면을 장식할 정도였다. 치열한 시도 간 경쟁과 함께 비대해지던 전국체육대회는 1972년 제53회 대회 때부터 초등학교부와 중학교부를 떼내 몸집을 줄였다. 그러나 대회 규모는 나날이 커져 이번 광주 대회에는 선수·임원 등 2만4518명의 선수단이 출전했다. 이 인원 외에 신문·방송 등 취재진과 시도별로 찾아오는 관계자 등을 더하면 올림픽에 버금가는 규모다.

그러나 1960∼70년대 전국체육대회 때만큼의 열기는 사라진 게 사실이다. 아시아경기대회와 올림픽을 치렀는가 하면 해외에 진출한 한국 선수들의 경기가 실시간으로 안방에 중계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30, 40년 전 풍경 가운데 하나는 전국체육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출발하는 각 시도 선수단의 출정식이었다. 지방에서 대회가 열릴 경우 서울 선수단은 서울역에서 성대한 출발 행사를 갖고 종합 우승의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또 각 시도 시장과 도지사 등은 선수단을 방문해 격려하는 게 가을철 큰 행사 가운데 하나였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기자들은 주최 시도가 마련한 환영연에서 고장의 특산 음식을 맛보며 안면 있는 이들과 안부를 주고받는 게 큰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 시절 전국체육대회는 또 열악했던 체육 기반시설을 한 단계 올려놓는 데 이바지했다. 현재 프로야구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전국의 주요 구장 가운데 광주·대구 구장 등은 전국체육대회용으로 지은 것이다. 지난 7월 프로야구 2군 올스타 경기가 열린 춘천 구장과 요즘은 프로야구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청주 구장은 전국소년체육대회용으로 건설했다.

전국체육대회가 한국 스포츠를 지나치게 엘리트 체육 위주로 끌고 갔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전국체육대회를 통해 한국 스포츠의 전반적인 수준이 향상된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이제는 지난날처럼 지나칠 정도의 시도 간 경쟁도 많이 사라졌다. 이번 광주 대회에서는 육상·정구·유도·야구·양궁·당구·복싱·수상스키·산악·바둑·검도·소프트볼·공수도 등 12개 종목에 걸쳐 동호인들의 축제가 펼쳐졌다. 특히 육상은 지난해부터 마라톤에도 문호를 열었다. 전국체육대회가 서서히 스포츠를 즐기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친선과 우정을 나누는 축제의 마당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번 대회에선 상징적 입장에 그쳤지만…

이번 대회 개회식에서도 이북5도 선수단은 맨 마지막으로 입장한 개최지 광주시 선수단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북5도 선수단에 실제로 북한 지역에 사는 대표선수나 임원은 없었다. 상징적인 입장일 뿐이다. 어서 빨리 말 그대로 ‘전국’(全國)체육대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됐으면 좋겠다. 전국체육대회는 이번 대회로 미수(米壽)를 맞았다. 100회 대회가 되기 전에, 서울역에서 서울시선수단의 출정식이 있었듯이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함경북도 청진에서 그리고 평양·원산·개성 등 북한 각 시도의 기차역에서 출정식을 치르고 개최지로 향하는 장면을 볼 수 있을까. 기차를 타고 베이징도 간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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