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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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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슬프게 하는 것

등록 2007-02-09 00:00 수정 2020-05-03 04:24

▣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변하는 세월도 아니고, 변하지 않는 세상도 아니다. 정말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오늘, 책방이 또 하나 없어졌다는 매우 사소한 일이다. 지금 대구에는 내가 갈 만한 새책방이 둘, 헌책방이 하나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몇 개씩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망하고 새책방은 서울에 본사를 둔 거대한 책방의 지점들뿐이며, 헌책방은 언제나 곧 망할 것 같은 하나뿐이다. 특히 헌책방은 이곳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곧 사라질 것 같다. 그래서 이 세상에 헌책방이 없는 유일한 나라가 될 것 같다. 이만한 도시라면 서양이나 일본에는 몇백 개 헌책방이 있는데 말이다. 이제 헌책방을 모르고 평생 TV나 휴대전화나 인터넷만 들여다볼 저 아이들이 나를 슬프게 하지만, 아이들은 내가 왜 슬픈지도 모를 것 같아 더욱 슬프다.

헌책방이 없는 유일한 나라?

책을 읽어야 돈을 벌고 경제가 좋아진다는 말을 믿기는커녕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이젠 없다. 책을 읽지 않아 폭력이 성행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폭력이 연예인 탓이 아니라 정치인 탓이며, 영화나 드라마나 게임 탓이 아니라 뉴스 탓이라고 하는 노래도 있지만 적어도 폭력적인 아이들은 뉴스를 보지도 않는 것 같다. 물론 어른들의 폭력이 문제라는 그 노래 가사는 옳다. 그 폭력은 성찰과 회의와 반성의 사고를 철저히 배제하며 오로지 행동을 위한 행동, 욕망을 위한 욕망만을 숭배한 저 군인과 기술자 지배시대에서 비롯되었다. 생각의 차이나 비판을 인정하기는커녕 도리어 차이의 공포를 확대해 배타적 적대주의에 빠진 군사문화 탓이었다. 그들에게 대화란 있을 수 없고 모든 대상은 오로지 적일 뿐이며, 그야말로 적과 동지 외에 다른 인간관계란 있을 수 없어, 삶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투쟁을 위한 삶, 죽음과 끝장을 위한 삶만이 있었기에 폭력적이었다.

지금도 변함없는 그 폭력은 불만과 불안과 불신을 먹고 자라면서 발전과 번영을 ‘약속’한다. 그 폭력은 선거 다수결이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대중을 앞세우지만 사실은 대중이 가장 약한 존재임을 알고 그 약점을 철저히 악용한다. 그 폭력은 언제나 계급적이어서 최고를 끝없이 동경하며 계급상승을 추구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그 유일한 상승원칙인 적자생존의 경쟁은 대부분의 몰락과 극소수 스타의 출세만을 보장할 뿐이다. 누구에게나 교육에 의한 출세의 기회가 열려 있다는 대중 민주주의를 가장하면서도 태어나면서부터의 절대적인 차이는 절대로 수정될 수 없이, 설령 성형수술까지 동원해도 그 차이는 더욱 강화되어 평생을 차별과 불만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폭력에 중독된 매트릭스적 존재

이런 동물적 세계에서 책은 무용지물이다. 독서에 의한 성찰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자질이 전자시대의 화면에 압도되어 사고는 물론 양심이나 죄악감까지도 없애 폭력을 일상화한다. 천편일률인 국수주의 역사물과 황당무계 일색의 연속극이 행복을 강매하며, 오로지 물건만을 사라고 국민에게 폭력적으로 유혹하는 TV를 보는 전 국민이 행복하다고 착각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중독당하는 점에서 행복한 파시즘이라고 불러도 좋다. TV는 전 국민의 눈귀, 생각과 행동을 통일지배하고 그것이 보여주는 모든 것을 모방하게 하며, 필수품이라는 휴대전화는 아예 우리 몸의 일부가 된 양 모두 그것을 귀에 대고 걷거나 그것을 두드려대며, 아니면 인터넷을 찾아 자가용이나 자기 방에 혼자 앉아서, 모두들 자신은 TV와 휴대전화와 인터넷 덕분에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특히 그 영화나 게임 속의 총을 든 조폭을 비롯한 모든 폭력적 주인공들이 가상현실의 이미지 세계와 현실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매트릭스적 존재로 아이들에게는 일체화되어 빠르게 유행하는 그것을 모방하는 것에 급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과거 군사독재 시절 통금 한밤의 군홧발과 총소리 대신, 이제는 대낮에 연구실 앞 복도를 달려가는 저 날카로운 하이힐과 휴대전화 소프라노 욕설도 나에게는 슬프고, 과거의 유신 찬양 글 대신 이제는 인터넷을 베낀 엉터리 글이나 악성 댓글도 슬프지만, 기껏 헌책방의 추억으로 그 슬픔이 씻어질 수 있을까? 아니면 헌책방을 찾아 망명이라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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