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김보협 기자의 연탄공장 체험… “다리 후들후들 눈 따끔따끔” 1장에 184원짜리 서민연료를 만들기까지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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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따끔따끔, 다리는 후들후들…. 김보협 기자가 서울 시내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연탄공장에서 호된 노동을 해보았다. 무엇을 느꼈을까.
▣ 글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연탄공장 아이디어를 꺼내놓았을 때 편집진의 반응은 다양했다. 이 코너는 기자가 뛰어든 세상이지 ‘체험 삶의 현장’이 아니다, 뭘 보여줄 거냐, 몸 상하는 거 아니냐, 아이디어가 궁하니까 몸으로 때우려는 거 아니냐 등등. 기름값이 뛰고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연탄 소비량이 다시 늘고 있다는 데서 착안한 아이디어지만 품값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었다. 대부분은 따끈따끈한 소재다, 다양한 얘깃거리가 있을 것 같다고 힘을 실어줬다. 요새 연탄 쓰는 사람들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연탄을 써보지 않은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무엇보다 에서 일한 지 1년이 넘도록 ‘뛰어들어’ 본 적이 없다는 압박감이 심했다. 독자들에게 아직도 이 코너가 살아 있음을 보여드려야겠다는 의무감도 있었다. 한때 9개의 연탄공장에서 하루 1천만장을 찍어내던 신이문 연탄공장단지에 마지막 남은 삼천리 연탄공장 취재는 이렇게 시작됐다.
11월25일, 새벽 바람이 차가웠다. 그러고 보니 동이 틀 때까지 일한 적이 많았지만 이렇게 일찍 집을 나서기는 오랜만이었다. 서울 서쪽인 성산동에서 동쪽 끝자락인 신이문동까지 6시까지 도착하려면 5시에는 출발해야 했다. 연탄공장은 6시부터 가동한다고 했다.
“거기 가는 차? 없어!”
처음부터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작업복이 마땅치 않았다. 섭외를 도와준 이춘재 기자에게 “작업복 주지 않을까” 하고 물었다가 “무슨 반도체 공장 가느냐”는 지청구를 들은 터였다. 출근 전 옷장을 뒤적거리다 구석에 처박아둔 군복을 발견했다. 맞다. 작업할 때는 군복이 최고다. 예비군도 끝났으니 빨기 힘들 정도면 버려도 부담 없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신발도 문제였다. 군화를 찾아봤지만 없었다.
새벽길이라 승용차로는 30분 정도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합정역에 내려 2호선을 타고 시청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전철이 오질 않았다. 공장에서는 아침 9시까지 오라는 것을 ‘오버해서’ 6시까지 가겠다고 했는데…. 첫차가 5시49분 차였다. 그렇다고 택시를 타는 사치를 부릴 수는 없었다. 좀더 서두르는 수밖에.
시청역에서 내려 1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뛰었다. 젠장, 환승통로는 왜 이리 길어. 허둥지둥 탔는데 청량리역까지 가는 차라 다시 갈아타야 했다. 이미 출근시간을 넘겼다. 신이문역에 내려 여러 표지판을 찾아봤지만 삼천리 공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창구로 달려가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아직도 연탄공장이 있나 모르겠네요. 예전엔 저쪽에 있었는데…” 하면서 방향을 가리켰다.
계단을 내려오니 ‘아침형 인간’을 상대로 어묵과 토스트를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다. 인심 좋게 생긴 60대 할머니가 자세히 알려줬다. “거기 가는 차 없어. 연탄 실으러 가는 트럭 있으면 얻어타든가…. 이 아파트 끼고 돌아서 굴다리 밑으로 쭈욱 걸어가봐. 근데 연탄공장에는 왜 가? 요새 젊은 사람들이 탄가루 묻히려고 하나? 기잔가 보네.” 할머니는 젊었을 때 연탄 판매상을 하다 싣고 내리는 게 힘에 부치면서 전업했다고 말했다. 삼천리쪽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지각한 경위를 알리려고 전화를 했다. 저쪽에서 왜 안 오느냐, 어디냐고 했다. 약간 짜증이 묻어 있었다. “핫둘~셋넷” 중랑천 건너편 둔치에서 새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구령에 맞춰 열심히 뛰었다.
저 멀리 공장 같은 현대식 건물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와~ 크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건물은 지하철 차량기지였다. “철컹철컹” 연탄을 찍어내는 소리는, 그 옆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건물에서 들려왔다. 길쭉하고 굵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연탄이 쏟아져나오고 있었고, 양 옆으로 늘어선 트럭 예닐곱대에서 부지런히 연탄을 싣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온통 검은색이었다.
탄가루를 쑤셔라!
사무실에 들어가 공장 간부들과 인사를 나누고 옷을 갈아입었다. “쉽지 않을 겁니다.” 각오는 하고 왔지만,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두달 전쯤 공을 차다 다친 갈비뼈가 욱신거렸다. ‘삼천리 연탄’ 로고가 찍힌 작업용 점퍼와 면장갑과 고무장갑을 받았다. 아래위를 국방색으로 무장할 걱정은 덜었다. 박동섭(47) 노조위원장을 따라나섰다. 박 위원장의 빨간 모자를 보자 군대 시절 유격훈련 조교가 떠올랐다.
기자에게 맡겨진 일은 저탄장 일이었다. 연탄의 소재인 무연탄을 컨베이어 벨트에 싣는, 사람으로 치면 입에 해당하는 연탄공장의 첫 공정이었다. 두세 사람 키높이의 건너편에서 불도저가 무연탄을 쏟아부으면 작은 책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는 체를 거쳐 아래쪽 컨베이어 벨트로 자연스럽게 들어가지만, 크고 단단한 덩어리는 도끼와 곡괭이로 부숴야 하고 끝이 날카로운 긴 쇠막대기로 탄가루가 잘 들어가도록 쑤셔주는 일이었다.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지만 탄가루 먼지가 쏟아졌다. 처음엔 습관적으로 머리를 숙이고 털어냈다. 곧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쪽을 맡고 있는 김씨와 ‘불도저 김씨’는 모두 50대였다. 55살 정년이 다 되어가지만 최근에 일손이 달려 일용직을 데려다 쓸 정도로 바빠지면서 정년 규정이 없어졌다고 했다. 20여명의 공장 사람들 가운데 올해 19년째인 박 위원장이 가장 젊은 ‘막내’였다. ‘연탄의 전성시대’에는 직원이 300명에 달했고 젊은 사람들이 북적거렸지만, 연탄 사용량이 줄면서 다 떠나고 남은 이들은 공장과 함께 늙어가고 있었다.
불도저 김씨는 짬짬이 2평 남짓한 휴게실로 기자의 손을 끌었다. 남도의 유일한 무연탄 생산지인 전라남도 화순 출신인 그는 기자와 동향이었다. “군대에서도 맞는 놈보다 맞는 거 지켜보는 놈이 더 아프당께. 글 쓰는 사람이 갑자기 이런 일하믄 아프니까 여기서 지켜봄서 영감을 떠올리는 게 낫지.” 연탄으로 시를 지어 사보에 실리기도 했다는 그의 삶의 여정은 ‘연탄길’이었다. 화순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엔 강원도 탄광촌에서 일했고, 서울 와서는 삼천리에 몸담았다. “동창들과 비교해보면 예전엔 여기도 괜찮았어. 근데 80년대 들어 팍팍해지더니 언제부턴가 격차가 나기 시작하드만.” 벌이는 200만원 안짝이라고 했다. 기술이 있으니 다른 데 가면 좀 낫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집도 가깝고 여기저기 옮겨다니기 싫응께. 요새는 공급이 달리니까 연탄 먼저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여”라고 답했다.
연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은 단순했다. 한번 벨트 위에 올려진 무연탄이 공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가는 체를 통과한 고운 가루는 바로 분탄 탱크로 들어가고 거친 덩어리는 분쇄기를 거쳐 다시 가는 체로 넘겨지는 과정이 반복됐다. 탱크에 담긴 고운 탄가루는 연탄 크기의 실린더로 들어가자마자 육중한 기계음과 함께 연탄으로 찍혀나와 다시 벨트를 타고 기계실 바깥으로 나갔다. 하지만 연탄 무게와 규격이 일정해야 하는 만큼 정교함이 필요했다. 실린더가 커지거나 구멍을 뚫는 핀이 얇아지면 무겁고 두꺼운 연탄이 나오게 된다고 했다.
기계 1대를 세운 실수
기자는 저탄창에서 기계실로 옮겨졌다. 기계실 안은 눈으로 봐도 뿌열 정도로 분진이 많았다. 이곳 노동자들은 방독면과 비슷한데 입과 코만 가리는 마스크를 착용했다. 기자는 건설현장에서 쓰는 1회용 마스크를 썼다. 엉성한 모습을 보더니 기계실 직원이 와서 얼굴과 마스크가 밀착되도록 고쳐줬다. 목이 칼칼할 때 먹으라고 주머니에서 홀스를 꺼내줬다. 장갑을 벗은 그 손도 검었고 내 손도 검었다.
처음엔 고운 탄가루가 컨베이어 벨트에서 10여개의 탱크로 들어가는 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작은 삽으로 허벅지 굵기의 구멍 주변을 정리하는 일을 했다. 막히면 삽으로 뚫어야 했다. 동맥경화를 방지하는 일인 셈이다. 30분 정도 했을까. 여러 구멍을 왔다갔다 하며 쩔쩔맸다. 구멍 하나가 막히자 아래쪽 기계 한대가 서버렸다. 다른 일이 맡겨졌다. 이번엔 벨트 위에서 연탄에 들어가면 안 되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홀스 아저씨’는 빠른 속도로 밀려드는 검은 것들 속에서 쇳조각, 나무토막, 헝겊쪼가리 등을 집어냈다. 기자 눈에는 다 그게 그거 같았다. 요령을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기계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을 테고 설명을 하려면 그가 방독면을 벗어야 하는데, 미안했다. 그는 이미 힘겹게 말했고 목소리엔 가는 쇳소리가 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후엔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나온 연탄을 차로 옮기는 ‘상차’ 작업을 했다. 상차는 트럭을 몰고 온 상인들의 몫이었다. 2장씩 겹쳐나오는 연탄을 한 손에 하나씩 한꺼번에 4장을 던지고 받았다. 연탄 1장이 3.6kg이니 14kg이 넘는 무게다. 차량 정리가 주무인 박 위원장이 40대 아주머니 혼자서 더디게 작업하던 차로 데려갔다. “체험하러 오신 분이니까 같이 하셔” 하고 소개했다. 돕는다니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지만 카메라를 보고 기겁을 했다. “우리 아저씨한테 혼나요. 애들은 모르는데….” 연탄공장 사람들도, 연탄을 파는 사람들도 카메라에는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검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연탄의 ‘검정’이 이들을 주눅들 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차례를 기다렸고 뒤로도 차가 밀려 있어 바삐 손을 놀려야 했다. 얼마나 빨리 차곡차곡 쌓느냐가 관건이었다. 체험만 하고 기사를 못 쓰는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말을 붙여야 하는데 그럴 틈이 없었다. “내가 2장씩 줄 테니까 한번은 이렇게 쌓고 다음 거는 요렇게 하는 거여유. 알겄시유?” 들은 대로 한다고 했는데 아주머니 손길이 한번 닿아야 가지런해졌다. 처음엔 손에서 손으로 건네주다가 박자가 맞기 시작하자 연탄이 날기 시작했다. 300장쯤 실었을까. 허리를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니 여기저기가 쑤시고 팔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땀이 흘러들어가 눈이 따끔거렸다.
“근데 탈렌트여유?”
담배를 핑계로 한숨 돌리면서 보니 상인들이 아무 연탄이나 싣지 않았다. 선택받지 못한 연탄은 벨트를 타고 들어가 분해돼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거쳤다. 아주머니한테 연탄 감별법을 물었다. “얘들을 잘 봐봐유. 머리가 왕관 모양으로 이쁘게 빠지고 까무잡잡한 빛이 나는 애들이 좋은 거유. 아니다 싶은 애들은 만져보면 그냥 부서져유.” 대답 끝에 엉뚱한 질문이 돌아왔다. “근데 탈렌트여유?” 하기야 요새는 개성 있는 얼굴을 가진 연기자들도 많으니까. 사정을 간략히 설명했다. “안 하던 사람이 이거 하면 내일 못 일어나유. 사진 다 찍었으면 인제 내려가유.” 얘기를 하면서도, 양손에 애를 안듯이 4장씩 번쩍 안아 옮기는 몸놀림은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990004 %%기자가 지치면서 아주머니 속도를 못 따라가자 공조를 파기했다. 대신 아주머니는 4장씩 뒤에서부터, 기자는 2장씩 앞에서부터 쌓아갔다. 4장 안아 옮기기를 시도는 해봤는데 애꿎은 연탄만 몇장 깨뜨렸다. 아래쪽 연탄을 가슴쪽으로 기울인 다음 연탄 아래로 얼른 손을 넣어 몸과 손으로 들어야 하는데, 벨트 위에서 움직이는 연탄에 기술을 부리려니 쉽지 않았다. 2장씩이라도 빠르게 움직이는 게 낫겠다 싶어 포기했다. 짐칸 뒤쪽에서부터 채워진 연탄이 어느새 2.5t 트럭에 가득 찼다. 2천장이 조금 넘었다. 파김치가 되어 차에서 내려오자 박 위원장이 다가와 “아나운서 황수정이 주저앉아 울고 간 곳”이라고 귀띔했다.
상차를 해보고 나니 여러 가지 궁금증이 풀렸다. 연탄공장은 차가 오지 않으면 연탄을 만들지 않는다. 공급이 달려도 미리 만들어 연탄을 쌓아두는 법이 없다. 따라서 창고도 없고 재고도 없다. 공장도 가격 184원짜리인데 즉석에서 만들어 즉석에서 팔아야지, 연탄을 옮기고 보관하는 데에 비용을 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기계를 새벽부터 돌리는 이유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원재료 상태에서 제품으로 만들어져 소비자에게 전달되기까지 연탄만큼 빠른 게 있을까. 나름대로 빠른 쪽에 속하는 신문 공장도 독자들의 아침 식탁에 오르기까지 하루가 걸린다.
즉석에서 만들어 파는 시스템
평소보다 긴 샤워를 하고 다시 기자로 돌아왔다. 몇 시간 일했을 뿐인데 검은 코가 나왔고 목이 칼칼했다. 기자가 원해 뛰어들었지만 이젠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새벽엔 잘 보지 못했는데 공장 밖에서 보니 삼천리 연탄공장은 섬이었다. 지하철 차량기지와 맞닿아 있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아파트 등 고층건물들이 서 있었다. 신이문역을 향해 아파트 숲을 걸으며 사람들을 보니 시간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흑백의 시대에서 컬러의 시대로 넘어온 것 같은.
젊은이 없이 40대 후반과 50대가 전부인 직원들이 시간이 흘러 일을 더 할 수 없을 때가 되면 그 공장은 어떻게 될까. 건물 뼈대만 남은 옆 연탄공장처럼 문을 닫게 될까. 그때쯤이면 달동네가 없어지고 연탄 수요가 사라질까. 아니면 다른 기피 업종들처럼 이주 외국노동자들이 빈자리를 채워 숨을 이어갈까. 연탄의 미래에 대해 또 다른 궁금증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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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은 조금 흐뭇할까</font>
삼천리 연탄공장 사람들은 공장에 앉아서 경기 흐름을 읽는다. 트럭 줄이 길어지면 경기가 나쁜 것이고 줄면 반대다. 공장에선 요새 하루 26만~28만장을 생산한다. 2003년부터 수요가 조금씩 늘기 시작하더니 올해는 지난해에 비해 30%가량 더 늘었다. 연탄의 경로를 쫓아가보면 어디서 수요가 늘었는지 알 수 있다.
단일업종으로는 서울 외곽쪽의 화훼단지의 수요가 대폭 늘었다. 보통 기름·연탄 겸용 보일러를 쓰는데 유가가 폭등하자 연탄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 공장 생산량의 20% 정도를 소비한다고 했다.
나머지는 80%가 난방용이다. 가정용은 크게 늘지 않은 반면 중소 규모 업소들, 예를 들면 식당·부동산중개업소·당구장 등 기름이나 가스 난로를 사용하던 업소들이 연탄 난로로 바꾸고 있다. 장사가 안 되니까 난방비를 줄여 버티는 것이다. 여기에 연탄불 구이집이 늘면서 도심에서도 연탄 소비량이 늘었다. 삼천리의 김성식 상무이사는 “비가 오면 연탄장사 공치는 날이고 특히 여름은 비수기여서 거의 수요가 없었는데, 연탄을 사용하는 음식점들이 늘면서 일정한 수요가 꾸준히 있다”고 설명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 80%를 웃돌던 연탄의 연료 점유율은 가파르게 떨어져 2000년 0.9%까지 떨어졌다. 올해 통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하락세가 그쳤거나 화살표 방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리는 없지만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질 뻔했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연탄은 흐뭇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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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삼천리만 남았다”</font>
연탄의 전성시대에 이문단지의 모습은 어땠을까. 1968년 서울 외곽에 조성된 연탄단지는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겨울철 서울의 하루 소비량인 700만~1천만장의 대부분을 이문단지에서 만들었다. 삼천리·동원·대성 등 7개 업체, 9개 공장이 있었다. 삼천리 공장은 지금보다 4배가량 컸고 1985년 연탄을 2장씩 찍어내 옮기는 자동화 시스템을 갖춰 하루 최대 200만장을 생산했다.
그러던 연탄산업의 날개가 꺾인 것은 노태우 정부 때(1988~1992년)다. 주택 200만호 건설 재개발 사업이 시행되면서 단독주택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연탄이 가스로 바뀌었다. 새로 짓는 단독주택은 연탄보일러를 놓을 경우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해마다 연탄 소비량이 40%씩 줄어 연탄공장엔 ‘악’ 소리가 났다. 삼천리의 김두용 상무이사는 “시장원리에 따라 순리대로 점진적으로 바뀌도록 유도하는 게 아니라 강제로 규제를 하다 보니 공장뿐만 아니라 탄광, 연탄 판매상들이 한꺼번에 다 죽어버렸다”고 말했다. 1990년대 들어 이문단지 공장들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하더니 2002년 대성 공장이 문을 닫고 이젠 삼천리만 남았다. 예전 공장 터엔 동부전동차기지와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연탄의 몰락은 판매상들에게도 치명적이었다. 한때 동네마다 하나씩 있던 판매점이 연탄만으로 수익이 나지 않자 쌀집 혹은 구멍가게와 겸업을 하다가 2000년대 들어 그마저도 자취를 감췄다. 모두 폐업·전업을 한 것이다. 요새 삼천리 공장에 차를 대는 상인들 가운데는, 한때 ‘사장’이었던 이들이 많다고 한다. 이젠 가게 없이 공장에서 연탄을 가져다가 업소나 가정집에 직접 배달까지 하는 것이다. 이들은 지역마다 편차가 있지만 연탄 1장당 80원가량의 이익을 남긴다. 1천장을 팔면 8만원가량 남는 것이다. 차가 밀리고 공장에서 기다리고 연탄을 싣고 내리는 과정의 어려움을 따져보면 이들의 삶도 팍팍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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