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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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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들어낸 것은 인간이 바꿀 수 있다”

‘기후 식민주의’ 고발하는, 글래스고 기후위기 시위 선봉 ‘워온원트’ 아사드 레만 인터뷰
등록 2022-09-24 13:44 수정 2022-09-24 23:25
사진=류우종 기자

사진=류우종 기자

기후위기는 인류 전체가 직면한 위기다.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는 지구 온도 상승이 1.5도라는 한계점을 넘으면 지구 생태계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파괴된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남성이건 여성이건, 한국인이건 아니건 ‘누구나’ ‘언젠가’는 기후변화의 재앙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때 ‘누구나’보다 ‘언젠가’라는 말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2021년 11월6일(현지시각)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가 열린 영국 글래스고에서 10만여 명의 시위대 맨 앞에 섰던 아사드 레만(사진)이다. 1989년부터 복지·인권·환경 단체에서 일해온 그는, 지금 ‘워온원트’(빈곤과의 투쟁·영국의 빈민구제 자선단체) 사무총장을 맡아 환경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레만은 기후위기를 타이타닉호에 빗댄다. 인류가 ‘기후변화’라는 빙하를 만나 궁극적으로는 다 함께 위협받게 됐지만, 선박의 가장 위 칸에 자리잡은 선진국은 연주를 들으며 여유롭게 ‘2050년 목표’를 얘기할 수 있는 반면, 맨 아래 칸의 가난한 국가들 발목엔 이미 물이 차오르고 있다는 비유다. ‘기후정의행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에 온 아사드 레만 사무총장을 2022년 9월20일 서울 중구의 한 회의실에서 만났다.

위기의 지구호, 일등석에 탄 선진국은 여유로워

기후불평등을 타이타닉호에 비유한 게 인상적이다. 서울에서도 2022년 폭우로 큰 침수가 발생했는데 반지하 거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부유한 사람은 높은 곳에 살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에겐 선택지가 없다. 경제적 조건에 따라 자연재해로 피해를 볼 가능성도 달라진다. IPCC 보고서를 보면 기후변화로 가난한 나라 사람이 죽을 확률은 그렇지 않은 나라 사람보다 15배 높다. 기후변화 자체만이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국가들은 시민을 보호할 능력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파키스탄은 이번에 국토 3분의 1이 물에 잠겼고, 도미니카는 단 한 번의 폭풍으로 건물·도로·학교·병원 등 10년간 개발한 인프라가 사라졌다. 복구비로 일부 인도적 지원을 받는다 해도 대부분의 부족분은 대출받아야 한다. 국가는 빚이 커지면 긴축재정을 해야 하고, 병원·학교 등 공공서비스는 악화한다. 국가가 자국민을 지킬 능력은 점점 더 약해진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기후변화로 또 강력한 태풍이 오면 재건이 불가능하다는 거다. 구조적 불평등이 생긴다. IPCC 보고서는 이것이 식민주의와도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기후위기와 식민주의가 어떻게 연결되나. 당신은 파키스탄계 영국인이다. 이번에 제국주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타계, 파키스탄의 홍수를 동시에 지켜봤을 텐데.

“유럽 역사에서 식민지 노예 제도를 보자. 무임금 노동력, 커피, 초콜릿, 면화 등 식민지에서 착취한 자원이 영국 산업화를 이루는 데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심지어 가톨릭 교황까지 이른바 ‘발견주의’(Doctrine of Discovery)를 만들어냈다. 유럽인은 세계 어디든 갈 수 있고, 이윤을 착취할 수 있고, 땅도 가져갈 수 있었는데, 이때 ‘신이 우리에게 허락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제 식민지들은 독립했지만 이미 많은 자원을 착취당한 뒤다. 국민을 보호하고 사회기반을 구축할 자원이 부족하다. 이런 방식이 정치 시스템 안에도 뿌리내렸다. 흔히 모든 인간의 목숨이 소중하다고 하지만, 그 목숨 가치가 백인과 같지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유독 주목받는 이유는, 유럽인이 자신과 닮은 사람들의 비극을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서다. 세계 수많은 곳에서 비극이 발생하고 있다. (백인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전쟁이나 재해는 익숙하지 않지만, 목숨에도 계급이 있다. 기후위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럽연합의 정책 입안자들은 온난화가 지구촌 곳곳에 매우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내심 ‘우리 나라는 (지구 온도가) 2∼2.5도까진 (올라도)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해 당장 변화를 미룬다. 경제적 혼란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지구 어느 곳에선 희생 지대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기후 식민주의’(Climate Colonialism)다.”

2021년 11월6일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가 열린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고 있다. REUTERS

2021년 11월6일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가 열린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고 있다. REUTERS

공동체에서 물을 뜨러 가야 하는 어린 소녀

기후 문제가 곧 사회정의 문제인 이유를 더 설명해달라.

“기후위기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여성, 어린이, 유색인종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기후위기로 가난한 국가 어느 지역에 비가 오지 않으면 그 공동체에서 누군가는 물을 길으러 점점 더 멀리 가야 한다. 이때 그 역할을 어린 소녀가 한다. 가족의 생존을 위해 여성은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된다. 불공평한 관계가 더 악화한다. 홍수가 났을 때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어떻게 대피해야 할까. 여성, 인종, 장애인 등 모든 이슈가 관련돼 있다.”

그럼 선진국의 기후위기 관련 보상 규모나 방식이 어떠해야 한다고 보나.

“당신과 내가 피자를 먹으러 갔다고 가정했을 때 피자 10조각 중 7조각을 내가 먹어놓고 비용은 똑같이 나누자고 하면 말이 되느냐. 기후 문제를 일으킨 나라들, 압도적으로 부유한 선진국들, 즉 유럽·미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일본 같은 국가에 일차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한국도 이제 부유한 국가 가운데 하나지만 중국 등에 비하면 인구가 적고, 산업화 역사도 200~300년에 이르는 선진국들에 비해 짧다. 책임이 국가마다 달라야 한다. 유엔은 피해 규모가 이미 수천억달러에 이른다고 추산한다.

서구 선진국들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걸 당장 멈추고 탄소배출을 줄여야 한다. ‘보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보상은 ‘내가 문제를 일으켰으니 돈 지불할게’란 방식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나아가 더 깊은 논의를 해야 한다. 돈을 주고 끝내는 게 아니라 ‘내가 저지른 걸 책임지는 건 당연하고, 여기서 더해 더는 네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조치가 필요하다.”

‘연대’가 유일한 답

지금 선진국들이 논의하는 ‘기후 금융’에서 가장 큰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나.

“대부분이 원조가 아니라 대출이다. 갚으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2년 전 모잠비크에서 홍수와 폭풍으로 물자·항구가 파괴됐고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모잠비크는 영국 은행에 더 많은 대출을 요청했는데, 다시 대출받을 땐 더 엄격한 긴축재정 조건이 따라붙는다. 소득이 생기면 대부분 대출금을 갚는 데 써야 하기에 발전이 힘들다. 가난한 나라들은 이 패턴에 갇힌다.”

산업화된 국가들이 더 큰 피해를 만들지 않으려면 ‘그린뉴딜’ 사업으로 새로운 발전 방식,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한단 얘기가 나온다. 그런데 그린뉴딜을 살펴보면 어느 것 하나도 쉽지 않아 보인다. 친환경 에너지, 공공부문 복원, 부자 증세, 생산의 현지화, 물욕 자제. 그럼에도 당신은 시장을 변화시키는 게 가능하다고 보나.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시장의 규칙은 인간이 만들어낸 거다. 노예제도가 그랬고 왕정제도가 그랬다. 한때 여성에게 참정권이 없었다. 어떻게 우리가 오후 6시에 퇴근할 수 있게 됐나? 거리에서 투쟁해 얻어낸 것이다. 함께한다면 시장도 움직일 수 있다. 영국 의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할 때 느낀 가장 큰 깨달음은 만약 우리가 의회 밖에서 힘을 합쳐 목소리를 낸다면, 정치인은 시민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엄청난 힘이 생겨난다. 우리에게는 ‘연대’가 유일한 답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규칙이라면, 인간이 ‘바꿀 수도’ 있어야 한다.”

일부 과학자는 태양·풍력 에너지 등이 좋은 대안이긴 하지만, 석유·석탄을 대체할 안정적인 에너지원으로 쓰기엔 기술적으로 아직 부족하다고 한다. 인류가 지구온난화로 맞이할 위기를 미루려면, 소형모듈원전(SMR) 등 원자력 에너지를 사용해서라도 시기를 늦춰야 한다는 얘기도 있는데.

“원자력 발전과 폐기물로 인한 환경적 해악은 무시한다고 해도 가장 큰 문제가 남는다. 가장 안전한 장소조차 더는 안전하지 않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우리는 단 한 번의 사고가 어떻게 나라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지 봤다. 날씨는 점점 더 극단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있다. 풍력·바이오매스 등 더 깨끗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만들고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데, 왜 원자력 발전의 길을 가야 하나. 이제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중요한 건, 불가능을 생각하지 않는 것

세계 각국 과학자들이 호소하지만 여전히 기후변화를 믿지 못하고 생활방식을 바꾸길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기후위기는 미래세대에 더 절실한 의제라 기성세대가 변화하긴 쉽지 않다는 의견도 있는데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미국에선 이런 캠페인이 있었다. 손주들이 그들의 할머니·할아버지한테 전화해 환경위기를 설득하는 것이다. ‘저 사랑하죠? 저도 사랑해요. 제 인생을 위해서 이런 일이 필요해요. 지지해주세요’라는 방식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사회를 변화시키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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