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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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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피크닉

등록 2021-12-04 11:36 수정 2021-12-05 02:12
1391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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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피크닉

하마터면 못 찾고 지나칠 뻔했다. ‘여기가 맞아?’ 전시관 ‘피크닉’(piknic)을 찾아가는 길은 미로 같았다. 서울 남대문시장 건너편 좁은 골목길 사이에 후문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나중에 알았지만 널찍하고 멋진 정문은 골목길 저 위에 있다.)

2주 전 목요일, 제1389호 원고 마감으로 헉헉대던 중에 충동적으로 <매거진 비(B)> 10주년 전시를 예매한 터였다. 정현주 서점 리스본 대표가 쓴 ‘책의 일-서점 편’ 원고를 읽다가 한 문장에 마음을 뺏겼다. ‘고객 마음을 궁극적으로 움직이는 건 어떤 의도와 진심에서 비롯했는가.’ 정 대표는 전시를 보고 나서 블루보틀 창시자 등이 고객을 움직인 ‘강력한 Why’에 영감을 받아 동네책방의 존재 이유를 더 단단히 세웠다고 썼다.

종이잡지의 존재 이유,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진심, 몇 달째 머릿속을 맴도는 고민의 답을 여기 가면 찾을 수 있을까. 마법에 걸려 홀린 듯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매진되려는 전시회의 빈자리를 냉큼 잡아챘다.

정작 샤넬, 무인양품, 레고 등등 <매거진 비>가 10년간 다뤄온 89개 브랜드 제품을 쭉 늘어놓은 전시회 자체에는 큰 감흥을 못 느꼈다. 그보다는 1970년대 지어진 제약회사 건물을 리모델링해 ‘피크닉’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시킨 공간 자체가 흥미로웠다. 도심 속으로 소풍을 오듯이 그곳을 찾는 이들이 줄 잇는 것도. 어렵게라도 여길 찾아와서 무언가를 보고 싶게 하는 힘. 종이잡지에 그 힘을 깃들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 두 번째 피크닉

하마터면 스치듯이 넘어갈 수 있었겠다. 전날 첫 번째 ‘피크닉’을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프랑스 앙뉘 시르 블라제라는 작은 도시에서 발간되는 주간지 <프렌치 디스패치>는 원래 미국을 기반으로 하는 여행잡지 <피크닉>에서 시작됐다. 최고의 기자들이 모여서 만드는 <프렌치 디스패치>는 세계 정치와 예술, 대중문화 등 다양한 소식을 다루는 잡지다. 실제 잡지는 아니고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에 나오는 가상의 잡지, 가상의 도시 이야기다.(특히 마감 시간을 1시간 앞두고 2천 자 분량의 기사가 들어갈 자리에 1만 자가 넘는 기사를 들이민 기자에게 편집장이 “최고의 기사”라고 추켜올려주는,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잡지 이야기다.)

비록 가상의 종이잡지일지라도,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력과 종이잡지 부흥의 가능성을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을까. 종이매체가 사라질지 모른다고, 그렇다면 <한겨레21>은 왜 버텨야 하는지, 떠나려는 독자를 어떻게 붙잡아야 하는지,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따위의 고민을 툭툭 털어내주지 않을까. 더구나 영화를 만든 웨스 앤더슨 감독이 애독했던 잡지 <뉴요커>에 바치는 헌사라고 했을 정도라면. 마법을 기대하며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마치 종이잡지를 펼쳐서 읽는 듯 느껴지는 놀라운 편집에, 색감이 사랑스러운 영화였지만 마법은 없었다. 영화가 끝날 무렵, 오히려 슬퍼졌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사무실에서 심장마비로 숨진 편집장의 부고 기사를 마지막으로 실은 뒤 폐간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으면 잡지를 폐간하라는 편집장의 유언대로. 영화 밖 세상에서 종이잡지 편집장은 잡지 폐간을 막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코로나19 일일 신규 확진자가 5천 명을 훌쩍 넘어서고, 대선 후보들이 내뱉는 말들만 따라다니기에도 정신없는 이 세상에서, 뜬금없이 피크닉 타령을 늘어놓은 것은, 다시 <21>의 존재 이유와 앞으로 <21>이 담으려는 이야기들에 대한 고민을 거칠지만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서다.

‘세상에 대한 냉소와 절망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여기에는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이 철저히 봉쇄돼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일 수는 없다. (…)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꾼이 필요하다. (…) 지옥이 전부가 아니라고, 이야기는 그 뒤에 시작된다고 말이다.’(이번호 ‘엄기호의 사건의 사회학’)

이번호에도 <21>은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찾아보려 애썼다. 쇠락해가는 지방 대도시의 구도심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김규원 선임기자가 기록했다. 그리고 다음호에는 피크닉같이 재밌고 신선한 <21>의 ‘다른 이야기’가 이어질 예정이다. 기대해도 좋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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