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이들 가운데 주필이던 장지연(1864~1921)이 1905년 11월20일치에 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장지연은 이후 조선총독부 기관지 에 일제 찬양 글을 써 (2009)에 오르는 치욕을 겪습니다. 그러나 을사조약에 대한 당대 지식인의 울분이 담긴 이 사설만은 지금까지 남아 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글의 마지막에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라며 절규합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냐고요? 축구 얘기입니다. 한국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은 8월31일,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9차전 경기에서 이란과 0-0으로 비겼습니다. 경기 결과보다 더 한심한 것은 내용이었습니다. 대표팀은 90분 동안 단 한 개의 유효슈팅조차 성공시키지 못했습니다(0-1로 패한 2016년 10월11일 테헤란 원정 경기에서도 유효슈팅이 없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날 무승부로 인해 대표팀은 9월5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원정 경기에서 승리해야 자력으로 월드컵에 진출하는 위기에 몰렸습니다.
이날 대표팀의 졸전을 보고 저는 자연스럽게 장지연의 사설을 떠올렸습니다. 네, 압니다. 오버지요. 그러나 마음만은 그랬습니다. 시일야방성대곡은 ‘오늘 목 놓아 통곡하노라’라는 의미입니다. 후반 막판 교체 투입돼 문전 위로 뜨고 마는 ‘어림없는 볼’ 하나를 날린 ‘대박이 아빠’(이동국)의 허탈한 표정을 보니 저도 모르게 목 놓아 통곡하고 싶은 기분이 들더군요. TV를 끄고 황폐해진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해 소파에서 얼핏 잠든 뒤 깨어보니 새벽 3시였습니다. 축구를 보고 이렇게 분한 생각이 든 것은 1993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서 미우라 가즈요시를 앞세운 일본 대표팀에 0-1로 패한 ‘도하의 비극’ 이후 처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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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리버풀 FC의 전 감독 빌 샹클리는 “어떤 사람들은 축구를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태도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축구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고백하건대, 저에게 축구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제 기억 속 첫 월드컵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었습니다. 당시 아시아에 배정된 두 장의 월드컵 티켓을 놓고 경쟁한 상대는 숙적 일본이었습니다. 1985년 10월26일 도쿄 원정 경기에서 문전에서 흘러나온 공을 논스톱 중거리슛으로 연결한 정용환의 첫 골, 그리고 일본을 서울 잠실로 불러들인 11월3일 홈경기에서 골대에 맞고 튀어나온 최순호의 슛을 주워먹은 허정무의 결승골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이 승리로 한국은 무려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합니다. 네, 이것도 압니다. 이 모든 게 전두환 군사정권 ‘3S 정책’의 산물이겠죠. 그러나 이후 전 순정한 육신과 육신이 맞부딪쳐 거친 파열음을 내고 둥근 공이 만들어내는 여러 우연과 필연을 이어붙여 거대한 서사를 만들어내는 이 스포츠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습니다.
아마도 축구는 생사가 걸린 문제는 아닐 겁니다. 대표팀이 승리한다고 한국 사회의 적폐가 청산되는 것도 아니며, 청년실업 문제가 해소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최순호의 호쾌한 슈팅, 김주성의 스피드, 홍명보의 위엄, 안정환의 아름다움, 박지성의 투혼과 헌신을 기억합니다. 이는 우리 인생 자체이자 어찌 보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대표팀이 러시아행 티켓을 놓친다면, 전 정말 울어버릴지도 모릅니다. 9월5일, 모두 함께 응원합시다.
길윤형 편집장 charisma@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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