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대선, 나는 정치부 막내 기자였다. 어느 정당의 대선 후보를 따라다녔다. 매일 아침 7시, 여의도 당사 앞에서 전세버스를 탔다. 대변인실 직원이 기자들에게 일정을 알려줬다.
오전 10시, 대전역에서 유세를 한다. 대표 구호(정책이 아니다)를 반복하고, 상대 후보를 비난(비판이 아니다)하며, 지역 정서(계급 정서가 아니다)를 자극하는 내용이다. 유세를 마친 후보는 근처 시장에서 붕어빵이나 어묵을 먹는다. 기자들은 설렁탕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다시 전세버스에 올라 광주로 간다. 또 한 번의 유세에서 후보는 오전 연설을 그대로 옮겨오는데, 지역 현안에 대한 언급만 살짝 바꾼다. 공약대로라면 대선 직후 전국 곳곳에 개발 광풍이 불 터였다.
오후 네댓 시 무렵, 기자들은 기사를 마감한다. 어제와 오늘의 기사가 크게 다를 리 없다. 저녁은 조금 느긋하게 먹고, 내처 소주나 맥주를 마시며 대선 캠프 관계자들과 이야기한다. 판세와 이미지가 입길에 오르는데, 정책 논쟁을 벌이는 일은 거의 없다. 잠은 관광호텔에서 잔다. 먹고 마시고 자는 비용의 상당액은 당에서 해결한다. 창피한 시절이었다.
그해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온 겨울 어느 날, 후보 따라다니는 것도 일이었던지 몸살이 났다. 다른 기자들이 술 마시는 동안, 2인1실 호텔 방에 들어와 누웠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대변인실 직원이었다. 남자 직원 혼자 왔음을 확인하고는 트렁크 팬티와 러닝셔츠 차림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어” 하며 그는 머뭇거렸다. 낭패스러운 표정이었다. “이거 뭐, 그냥 다 드리는 거니까….”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감기약에 취해 어찌 대응할지 금방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뒤로 물러섰다. 얼굴이 더 붉어진 그는 한 걸음 다가왔다. “에이, 그러지 말고.” 결심했다는 듯 하얀 봉투를 나의 트렁크 팬티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문을 열었을 때, 왜 그가 당황했는지 순식간에 이해됐다. 봉투 찔러넣을 주머니가 내 옷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필.
딱 그 찰나, 룸메이트 기자가 술취한 팔자걸음으로 방에 들어왔다. 대변인실 직원의 손은 여전히 내 팬티 안에 있었고, 나는 그의 팔목을 꽉 붙잡고 있었으며, 동료 기자는 호텔 방에서 벌어진 우리 둘의 씨름 자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취재 환경이 투명화되기 전 일이다. 요즘엔 이런 일이 없다고 믿는다. 이제 와서 15년 전 촌지 제공 시도를 탓하려는 것도 아니다. 촌지를 거절했을지언정 밥과 술을 무수히 얻어먹은 나도 그 ‘거래 관행’의 일당이었다. 질문은 다른 데 있다. 우리는 무엇을 거래한 것일까.
기자들을 다룬 미국 드라마 에는 공화당 대선 후보 토론회를 준비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호한 답변으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후보들에게 신물난 기자들은 과거 연설·인터뷰·문서 등을 추적해 후보들의 예상 답변을 뽑아낸다. 이를 바탕으로 기자들은 후보들의 판에 박힌 답변을, 구체적 근거를 들어 반박하거나 추궁하는 공격적 인터뷰를 준비한다.
이들이 시도한 것은 ‘게임의 규칙’을 뒤집는 일이다. 알고 싶은 것을 묻는데 답하지 않는 인터뷰, 말하는 대로 받아 적는 유세 기사는 싫다는 것이었다. 드라마에서 뉴스 책임자는 말했다. “(헛된 공약이나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는) 후보들에게 위증죄를 적용해야 한다. 기자의 질문은 더 과감해져야 한다. 충분하다고 느낄 때까지 더 질문해야 한다. 그런 ‘반대심문’을 견뎌낼 정치인이 필요하다.”
앞으로 두 달 이상 계속될 반대심문을 준비했다. 지난 한 달여 동안 함께 토론했다. 서보미 기자가 주로 아이디어를 냈고, 매주 회의 때마다 다른 기자들이 의견을 보탰다. 세부 내용은 앞으로 계속 다듬겠지만, 우리의 뉴스룸에서 오간 이야기의 대강을 추려본다. 반대심문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다.
1. 많은 언론의 수많은 선거 보도 가운데 하필 을 봐야 하는 이유를 만들자. 만 읽으면, 누굴 왜 선택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도록 하자.2. 집중하자. 인력도 지면도 돈도 부족한데 이것저것 다 할 수 없다. 대선 기사만 쓰자. 대선이 끝날 때까지 한국의 (미국의 정치 전문 매체)로 변신하자.
3. 박근혜씨가 탄핵될지, 대선은 언제 치러질지, 여러 정치 일정이 유동적이지만 대선 보도를 위한 시간이 빠듯하다. 일단 연속 특집호를 시작하자. 탄핵 안 되면 ‘탄핵 기각 특집호’를 내자.
4. 보도에 앞서 우리 스스로를 투명하게 드러내면 어떨까. 서구 언론은 지지 후보를 공표한다. 우리의 정치적 판단은 무엇인지 여러 방법으로 독자에게 전달하자.
5. 후보 말고 의제·정책을 보도하자. 은 지난 몇 년 동안 세월호 진상 규명, 국가정보원 해체, 표현의 자유 확대, 기본소득, 차별금지 등을 줄기차게 주창해왔다. 이에 대해 각 후보가 어찌 생각하는지 제대로 캐묻자.
6. 후보가 내세우는 여러 정책·공약 가운데 ‘대표 의제’를 집중 분석하자. 대표상품으로 내놓는 의제를 분석하면, 그 후보의 자질도 제대로 검증할 수 있다.
7. 선거 취재 경력이 있건 없건, 연차가 많건 적건, 모든 기자가 대선을 취재하자. 경제·사회·문화에 관심 있었던 눈으로 정치를 들여다보면, 새로운 기사를 쓸 수 있다.
8. 시민의 눈높이에서 검증하자. 예컨대 “정치를 잘 몰라서 그런데, 방금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라고 묻는 방송인 김미화씨와 함께 상식의 눈으로 꼬치꼬치 캐묻자.
9. 우리의 고민을 매주 독자들과 나누고 지혜를 구하자.
여기에 대선 후보별 담당 기자를 적는다. 의제별 담당 기자도 조만간 공개할 것이다. 다음호 ‘만리재에서’는 기자들의 정치 성향을 소개할 생각이다. 게임의 규칙을 바꿔보고 싶다. 팬티 차림의 속기사로 일하며 향응이나 대접받던 15년 전의 창피를 이제라도 만회해보고 싶다.
안수찬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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