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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만의 업데이트… 노동 사각지대 비출 ‘다시, 노란봉투’ 캠페인

플랫폼, 프리랜서 특고, 돌봄, 경비, 청소… 제도 밖 필수노동자들 찾아 빈 곳 채우는 사회로
등록 2026-05-28 22:01 수정 2026-06-01 14:59
1988년 8월7일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들과 그 가족이 회사 앞에서 ‘노동부 장관 퇴진’과 ‘사장 구속'을 촉구하며 직업병 판정, 피해 보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1988년 8월7일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들과 그 가족이 회사 앞에서 ‘노동부 장관 퇴진’과 ‘사장 구속'을 촉구하며 직업병 판정, 피해 보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아름다운재단이 최근 ‘다시, 노란봉투’ 캠페인을 시작했다. 2014년 쌍용차 등 대규모 손배·가압류로 고통받던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노란봉투’ 캠페인을 10여 년 만에 확장·업데이트해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재활용 선별 노동자 등 사회 유지에 필수이지만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지원하려 한다. 아름다운재단 배분위원으로 활동하는 김신범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이 이 캠페인과 ‘남현섭기금’을 함께 소개하는 글을 보내왔다.-편집자 주

 

꿈틀대던 민주화의 열망은 1987년 거리를 가득 채웠다. 같은 시기, 공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고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산업재해와 직업병이 사회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2년 4월 국무회의에서 전문의 수련 및 자격에 대한 규정을 개정해 10번째 전문과목으로 산업의학과(지금은 ‘직업환경의학과’)를 추가했다. 내과의사나 외과의사처럼 일터의 질병을 다루는 의사가 생긴 것이다.

1990년대를 통과하면서는 산재 업무가 노무사들의 중요 업무 영역이 됐다. 공인노무사법이 제정된 것이 1984년이지만, 초기에는 노사분규가 중요 영역이었고 산재와 직업병을 상담할 수 있는 노무사는 거의 없었다. 그때도 산재는 존재했다. 일하다 다친 사람을 위한 의사와 노무사가 생기기 전에도 말이다. 그 빈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채워졌을까?

국가가 놓친 공백 채운 산재 피해자들

디지털단지가 들어선 서울 구로의 옛 풍경은 지금과 달랐다. 근처 병원마다 공장에서 손가락과 손목이 기계에 잘린 노동자가 가득했다. 그들은 자신이 산재를 당했다는 것조차 몰랐다. 먼지를 많이 먹으면 돼지기름으로 씻어냈고, 허파에 생긴 암 덩어리는 착하게 살지 못해 찾아온 천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눈을 뜨는 존재가 있었다. 사라진 손가락이 ‘산업재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자신을 ‘산업재해 노동자’라 불렀다. 그리고 같은 아픔을 겪는 동료들에게 회사 눈치를 보지 않고 법에 따라 산재 보상을 받고 치료받도록 안내하는 일을 스스로 해나갔다. 노무사도 없고 산재를 다루는 의사도 없던 그 공백이 피해자들의 활동으로 서서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침에 우유를 배달하고 모여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고 각자 담당한 병원으로 흩어졌다. 병실마다 기웃거리며 환자들의 손가락과 손목을 확인했다. 1990년 그렇게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라는 존재가 태어났다. 나는 1993년 어느 날 국회에서 열린 원진레이온 직업병1 대책 마련 토론회에 갔다가 그들을 만났고 사무실까지 따라갔다. 라면을 얻어먹고 우유도 마신 다음 깨달았다. 빈틈은 균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있는 것이고 이렇게 채워지는 것이었다.

나는 전공을 바꿔 대학원에서 산업보건학을 배운 다음 원진레이온 피해자들이 만든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우리처럼 모르고 당하는 사람들 없게 해줘.”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가는 직업병 피해자들은 다른 이의 청춘을 푸르게 지켜달라고 했다. 나는 저절로 빈 곳으로 흘러가 채우는 자가 되었다.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대한민국 산재 사고율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2026년, 그래도 나는 국가의 예산과 조직이 닿지 않는 빈 곳이 있다는 걸 안다. 이주노동자와 그들의 아이들, 노동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는 일을 하는 사람들. 그 빈틈을 채우기 위해서는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바꿔보려는 시민들의 목소리와 움직임 또한 중요하다. 사회변화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모일 때 비로소 제도와 정책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남현섭기금’으로 피어날 희망

그 목소리를 모으는 데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산업재해 노동자의 친구’ 고 남현섭 전 인천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 사무국장(이하 남현섭 국장)을 떠올린다. 남 국장은 1992년 산재로 네 손가락을 잃은 이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산재 피해자들을 상담하고, 비정규직 부당해고자를 위해 목소리를 냈다. 피해 당사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선생님 산재니까 보상 신청할 수 있다’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일깨워주는 사람이었다. 이후 서울과 인천 산업재해노동자협회에서 상담부장, 사무국장을 역임하며 활동을 이어갔으나 2016년, 결국 그는 폐기물 공장 스티로폼 파쇄기에 압착되어 산재 사망자가 되었다. 나는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2024년 아름다운재단에 ‘남현섭기금’2을 조성했다.

‘남현섭기금'은 일하면서도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 사회를 떠받치고 있지만 정작 제도 밖에 놓인 필수노동자들 곁에 닿는 데 쓰일 예정이다.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특수고용 노동자, 돌봄·경비·청소 등 지역 기반 서비스직, 재활용 선별원 등 노동권을 침해당하고도 어디에 말해야 할지 몰라 혼자 감당해온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경험이 개인의 억울함으로 끝나지 않도록 구조를 바꾸는 힘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다시, 노란봉투 캠페인

2026년은 63년 만에 노동절의 이름을 되찾은 해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현섭이 형’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세상의 변화에 멈추지 않고, 노동의 사각지대에서 오늘도 땀 흘리고 일하는 사람들을 발굴하기 위해 시작한 아름다운재단의 ‘다시, 노란봉투’ 캠페인이 더욱 반가운 이유다. 내가 ‘남현섭기금’을 만든 이유는, 또 다른 피해자 누구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그 빈 곳을 채울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나도 우리 모두도, 빈 곳에 흘러 들어가 채우는 존재이기를 기도하는 마음.

아름다운재단의 ‘다시, 노란봉투’ 캠페인 정보무늬(QR코드)

아름다운재단의 ‘다시, 노란봉투’ 캠페인 정보무늬(QR코드)


 

1. 인견사(실의 일종)를 만드는 원진레이온 공장에서 이황화탄소(CS₂)에 만성적으로 노출된 노동자들에게 발생한 집단 직업병·산업재해. 1988년 한겨레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2.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2021년 펴낸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포도밭출판사 펴냄)의 인세 500만원으로 만든 기금.

 

김신범 아름다운재단 배분위원·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

김신범 아름다운재단 배분위원·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

김신범 아름다운재단 배분위원·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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