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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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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

등록 2016-11-29 08:04 수정 2020-05-02 19:28

마감이 한창이던 11월25일 오후, 정보기관의 검열·감시를 피하려고 ‘텔레그램’에 만들어둔 대화방에서 긴급 토론이 시작됐다.

편집장 이번호 편집장 칼럼에 이렇게 쓰면 어떨까요. “은 이제부터 모든 기사에서 대통령 직함을 빼고 박근혜씨 또는 박근혜라고 부른다. 우리는 법적 절차에 앞서 시민 절대다수를 대변하여 그를 탄핵한다.” 물론 개별 기사에서도 ‘대통령’ 직함은 다 빼고.

(책임강 강한) A기자 칼럼에만 그렇게 쓰고, 기사에선 직함을 붙여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편집장 매체 차원의 정치적 입장을 표방하겠다는 거. 외국 언론도 대선 직전에 뉴스룸 의견을 모아서 지지 후보를 밝히는 것처럼.

(주변을 잘 웃기는) B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상할까요? 전두환·박정희도 전 대통령은 붙여주잖아요.

(기사가 잘 써지지 않아 고생하던) C기자 그래도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써야 기사 분량을 좀 늘릴 수 있는데 ㅜㅜ.

편집장 비상한 시국이므로 언론이 여론을 선도한다는 차원에서, 아울러 언론 역시 뉴스룸 합의에 바탕을 두고 ‘직접행동’을 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반짝반짝하는) D기자 그렇다면 표지에 전면적으로 내걸면서 본격적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그런데 그게 좋은 방식일지는 판단이 잘 안 서네요.

(기사 분량 채우는 게 주요 관심사인) C기자 그럼, 박근혜라고 쓸까요? 박근혜씨라고 쓸까요?

(도발적인) E기자 박씨라고 부르는 것이 시민 절대다수의 의견에 따른 것이라는 데 명분을 둔다면, 나중에 지지율이 20%나 30%로 올라가면 다시 박근혜 대통령으로 환원하는 건가요?

편집장 헛, 예리하군요. 평소답지 않게…. 여튼 의회와 헌재의 판단 이전에 뉴스룸의 자체 판단에 따라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자는 취지입니다. 여론을 따르는 게 아니라 여론을 이끈다는 느낌….

(한 번 더 도발하는) E기자 비가역적으로 표기하게 될 텐데, 앞으로 1년4개월을 ‘박씨’라고 쓸 수도 있겠네요. 이 국면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상황이니. 지금이야 어색하진 않지만 1년 뒤, 대선 국면이 본격화되면, 대통령이 어찌됐든 역할을 할 텐데, 그 무렵엔 어떻게 표기하면 좋을까요.

편집장 흠. 뭐, 1년4개월 동안 계속 그렇게 적지요. 그사이 편집장이 바뀌어 편집 방침이 변화되면 하는 수 없겠지만.

(계속 반짝반짝하는) D기자 독자에게 대통령의 직함이 주는 무게감을 고려할 필요도 있습니다. ‘박근혜씨’가 저지른 일보다는 ‘박근혜 대통령’이 저지른 일이 훨씬 더 크게 다가오는 측면이 있지요.

편집장 ‘박근혜씨가 대통령으로서 저지른…’, 이런 식으로 쓰면 어떨까요.

(주변을 또 웃기고 싶은) B기자 그렇게 쓰면 기사 분량은 늘어나겠네요.

편집장 -.- 이 와중에 깨알 같으시군요.

(여전히 마감 못하고 있는) C기자 현 청와대 세입자, 세종로 1번지 거주자… 이렇게 쓰면 어떨지 생각해봤…. 아닙니다. 기사나 쓰겠습니다

편집장 두루 의견 주십시오. 매체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것이니.

(딱 부러지는) F기자 저는 그냥 박근혜 대통령. 제도는 제도니까.

(지성적인) G기자 이 사람이 어쨌든 지난 대선에서 과반수 시민의 표를 얻은 선출직 대통령인데. 아직 법적으로 유죄판결을 안 받은 상태에서 우리가 대통령 직함을 떼는 건…. 최소한 탄핵안이 가결됐을 때, 정치적으로 이미 대통령이 아니기에 박근혜씨라고 부르겠다는 명분이 생긴 다음에 고려하는 건 어떨까요.

(침착한) H기자 이젠 대통령이라는 직함 붙이는 것 자체가 비아냥이 돼버린 상황 아닐까요. 그렇다면 굳이….

(할 말 다 하는) I기자 대통령에서 물러나야 하는 이유가 너무 많으므로 호칭 안 써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뉴스룸 내부 논의로만 결정해서 공표하기보다는 ‘독자의견도 받아서 함께 검토하고 결정하겠다’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편집장 ㅇㅋ. 그럼, 이렇게 적겠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쓰는 모든 글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아니라 ‘박근혜씨’ 또는 ‘박근혜’라고 적겠다. 대통령의 직에서 그를 탄핵하겠다. 혹여 취재원의 말이나 문서를 인용함에 있어, 그 취재원 또는 해당 문서가 그렇게 적은 경우를 제외하면, ‘박근혜 대통령’이란 표현을 쓰지 않겠다. 박근혜씨 마음속에선 여전히 임기를 꽉 채울 대통령을 몽상하고 있으니, 나의 마음속에서라도 대통령을 퇴진시키겠다.

박근혜씨는 대기업의 뇌물을 받아 특정인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 정경유착을 부활시켰다. 실정법을 어겼다. 또한 박근혜씨는 공적 지위에 있지 않은 인물들에게 대통령의 헌법적 임무를 맡기거나 유출해 국가 체제의 근간을 흔들었다. 헌법을 무시했다. 무엇보다 박근혜씨는 자신을 포함한 특정 소수 기득권자들의 이익과 편리만 도모했다. 시민의 대표자로서 헌법이 부여한 숭고한 공적 의무를 저버리고 불공정·불평등의 극단적 구조를 가장 나쁜 방식으로 최악으로 몰아, 대다수 시민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과 배신감을 남겼다. 그는 이 시대의 정의, 그리고 정의에 대한 모두의 믿음을 명백히 저버렸다.

그 죄를 밝히고 징벌하는 작업이 검찰, 특별검사, 의회, 헌법재판소 등 일련의 법적 절차를 통해 진행되고 있지만, 그에 앞서 나는 시민사회의 일원인 언론인으로서 양심과 정의의 잣대에 따라 박근혜씨를 대통령직에서 탄핵한다.

그는 나의 대통령이 아니며, 내가 사는 나라의 대통령도 아니고, 내가 이어갈 민주공화정의 역사 속 대통령도 아니다. 그는 조만간 감옥에서 죗값을 치러야 할 범죄자다. 박근혜씨만큼은 감옥에 보내야 하겠다. 그래야 미래의 대통령들이 정신을 차리겠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서겠다. 어제가 갔어도 진정한 오늘이 오지 않았으되, 그나마 오늘의 일이라도 제대로 치러야 내일을 준비할 수 있겠다.

따라서 시민사회를 위해 복무하는 다른 언론인들도 자신이 쓰고 말하는 칼럼 또는 기사에서 박근혜씨를 박근혜 대통령으로 칭하지 않는 일에 동참할 것을 제안한다. 언론은 자연인 박근혜씨를 헌법기구인 대통령으로부터 분리해 마땅히 범죄자로 평가하고 취급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울러 나와 함께 일하는 기자들은 의 모든 기사에서 ‘대통령’의 직함을 삭제할 것을 고심하고 있다. 그것은 기자 개인의 결심을 넘어 언론매체의 입장을 정하는 일이다. 이에 대한 여러 독자의 의견을 구해 내부 토론을 거듭하겠다.

한 달 전부터 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집호를 연속 발행하고 있다. 앞으로도 당분간 그리할 것이다. 긴 싸움에서 성취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덕목은 ‘파격’이다. 저마다 여러 방식의 파격을 도모할 때, 그 파격의 놀라움과 즐거움으로 난관을 인내할 때, 시민은 부정의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자를 마침내 끌어내릴 수 있다.

그 길에 앞장서고자 파격으로 우리의 지면을 계속 채우고 있다. 평소보다 지면을 늘리고, 그 대부분을 박근혜 정부의 부정·부패·참상에 대한 기사로 채우고 있다. 단독·추적보도와 더불어 유쾌한 기사를 함께 준비하고 있다. 덩달아 이 칼럼의 제목은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으로 이어져왔다. 이제 마침내 대통령의 직에서 그를 탄핵하게 됐으니, 그 연속 제목의 마지막을 적는다.

박근혜씨, 당신을 향한 분노와 조롱과 저주는 더 이상 약자의 가난한 독백이 아니다. 보라. 모두 한입으로 말한다.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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