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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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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

등록 2016-09-11 17:23 수정 2020-05-03 04:28

2012년 12월19일 오전, 심심풀이 내기에 기자 여러 명이 참가했다. 대선 결과 예측에 1만원씩을 걸었다. 자정 넘어 당첨자가 결정됐다. 그는 박근혜 후보의 당선은 물론 2위 후보와의 격차를 10만 표 단위까지 적중시켰다. “미아리에 돗자리 깔았냐. 어찌 그리 정확하게 맞혔느냐”는 말을 들어도 나로선 해줄 이야기가 없었다. 어림짐작인 것이지, 신이 내렸을 리 없지 않은가. 다만 나름의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대선 직전까지 후배 기자들과 함께 ‘대선 만인보’라는 기획을 연재했었다. 전국 곳곳의 소외계층들이 대선에 바라는 바는 두 가지로 집약됐다. “힘들어 못 살겠다.” “박정희가 그립다.”

그들에게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였다. 박정희 신화는 굳건했고 그 아우라는 딸에게 투사되고 있었다. 무능한 민주주의 대통령보다 유능한 독재 군주가 더 낫다는 환상을 다수 서민들이 공유하고 있었다. 이를 깨트릴 캠페인도 후보도 등장하지 못했으니 선거 결과는 뻔하지 않겠는가.

한국의 정치 수준을 뒤집으면 거기 한국 언론의 수준이 있다. 북한의 김일성주의와 한국의 박정희주의가 적대적 공존을 통해 반세기 동안 재생산된 것과 똑같이 한국의 정치와 언론은 공존공생했다. 서로 으르렁대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 상층 구조를 함께 재생산한다. 예컨대 최근 청와대와 의 격투는 사뭇 살벌하지만, 그 승자가 청와대건 건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군사기지를 제주 강정에, 이제 경북 성주에 욱여넣고, 국회 청문회 의견서를 묵살하며 장관 임명을 강행하고, 언론의 비판 보도에 귀 닫으며 비리 측근을 감싸고, 경제 불황을 외면하며 북한 위기론만 우려먹는 동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는가. 물론 그렇다. 그렇다면 민주주의가 왜 위기에 처했는가. 언론 때문이다.

미우나 고우나 대중을 갈아엎을 수는 없다. 그러나 권력을 갈아엎을 수는 있다. 다만 그 전에 언론부터 엎어야 한다. 언론과 권력이 쌍을 이뤄 나쁜 정치를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바꾸는 것은 몇 년에 한 번 있는 선거를 통해 아주 제한적으로 가능하지만, 언론을 바꾸는 것은 일상적으로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언론을 뒤엎겠다는 일이 보수 언론을 몰아내고 진보 언론을 구독하자는 식이어선 곤란하다. 그것은 집권당이 싫으면 제1야당을 찍어야 한다는 ‘제한된 선택의 강제’의 재현일 뿐이고, 그런 강제에 사람들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언론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용어는 새로 정립돼야 한다. 정치적 좌표가 아니라 혁신의 성취에 따라 (혁신에) 보수적 언론과 (혁신에) 진보적 언론이 있을 뿐이다. 유능함을 스스로 입증하는 매체가 언론계를 이끌게 될 것이고, 그 혁신은 언론의 본성상 대중에게 더 가까이 깊이 다가가는 노력일 수밖에 없고, 그런 언론 덕분에 형성된 ‘계몽된 대중’(informed citizen)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작동시킬 것이다.

언론 혁신과 정치 혁신, 이를 통한 삶의 혁신을 꿈꾸며 거대한 실험을 시작한다. ‘기본소득, 1000일의 실험’이다. 먹고사는 문제를 직시해 민주주의를 새로 작동시키려는 프로젝트다. 적대적 공존 말고 우호적 공존을 꿈꾸려 한다. 황예랑 기자가 오랫동안 준비했다. 새 세상을 꿈꾸는 독자들에게 이 건네는 한가위 선물이다.

*졸저 의 일부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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