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기사로 말한다고 기자들은 말한다. 핏대 높여 외치기보다 사실 보도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과 의견의 분리’라는 저널리즘의 대원칙에서 비롯한 경구다. 기자의 역할은 ‘진실 보도’에 있다. 그것은 ‘사실 보도’를 통해 누적적으로 완성된다. 여기서 사실로부터 의견을 분리할 필요가 생겨난다.
첫째, 사실을 취재하려면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감각을 극대화하려면 생각을 잠시 멈춰야 한다. 의견은 어떤 사실을 주목하게 만드는 동시에 어떤 사실을 못 보게 만든다. 아는만큼 보인다. 뒤집어 말해, 아는 것만 보게 된다. 의견을 미루고,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만져야 더 많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둘째, 의견을 앞세운 기사는 널리 읽히지 않는다. 독자는 특정 입장에 고착된 것으로 판명된 언론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온전한 사실로 보이는 기사라야 독자는, 제 의견과 다를 경우에도, 꼼꼼히 읽는다.
셋째, 사실을 공유해야 공론이 형성된다. 민주주의는 공공의 문제를 공중이 결정하는 공론의 정치다. 각자 의견을 떠들기 전에 공통의 지평부터 마련해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하는 데까지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사실, 사실, 더 많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결정적인데, ‘사실과 의견의 분리’ 원칙이 의견을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감정·추정·주장·사실을 섞어 표현했던 전근대의 방식을 탈피해) 좋은 의견을 오히려 제대로 표명하라는 원칙에 가깝다. 현대 언론의 사상적 지주인 존 밀턴, 존 스튜어트 밀 등은 ‘의견의 자유로운 표현’에 목숨을 걸었다. 사실 보도는 자유로운 의견 표명의 필수조건이지, 그 자체가 절대적 목적인 것은 아니다.
의견 없는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 혼란스런 대중에게 명확한 의견을 제시해야 할 사안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지 않는 것은 언론의 또 다른 직무유기다. 물론 이때 언론의 의견은 사실 보도의 수준만큼만 신뢰와 권위를 얻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편집장 칼럼에 담아 밝힌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는 사상과 양심, 표현과 언론의 자유 일반에 대한 명백하고 치명적인 침해다. 하나의 사실과 의견을 국가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진실을 시궁창에 파묻는 일이다. 예컨대 지난 10년에 걸친 밀양 송전탑 투쟁은 그 자체로 역사다(표지 기사 ‘죄가 있어야 벌 받는 거 아이가’ 참조). 언론은 사초다. 역사의 초고다. 역사를 단일화하려는 국가권력은 장차 이러한 언론 보도까지 통제하려 들 것이다.
하여 이 글은 ‘사실과 의견의 분리’라는 저널리즘 원칙에 입각한 의견이고, 그 원칙이 사회 모든 부문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견이며, 현 단계에서 취득 가능한 최대한의 사실 취재에 기초한 의견인 동시에 의견의 분명한 표명이 갈급한 시대에 대한 의견이다.
이미 별처럼 많은 시민들이 반대의 뜻을 밝혔다. 그들과 함께하는 우리는 에서 일하는 김범준, 김선식, 김완, 김진수, 김효실, 남아름, 류우종, 박민지, 박수진, 박승화, 서윤희, 손정란, 송호진, 신소윤, 신윤동욱, 안수찬, 이문기, 이문영, 이완, 장광석, 전진식, 정용일, 정은주, 최혜란, 허선주, 홍석재, 황예랑이다.
추신1: 오랫동안 지면을 빛내고 가꿔준 구둘래·이정연 기자가 다른 부서로 옮겨갔다. 그들에게 빚진 많은 것을 잊지 못한다. 홍석재 기자가 새로 합류했다. 천군만마를 얻었다.추신2: 다음주에 발행될 제1085호부터 전체 지면 96쪽을 88쪽으로 줄인다. 그래도 시사주간지 가운데 가장 많은 지면이지만, 왜 줄이는지, 정기독자를 위한 새로운 서비스는 무엇인지 등을 다음호에서 자세히 소개하겠다. 변함없는 격려·응원·제안을 부탁드린다. 아시겠지만, 항상 감사드린다.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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