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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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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없이 집밥을 먹고 싶다

등록 2013-10-12 16:06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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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할 때 텔레비전을 켜두는 건 정말 나쁜 습관입니다.” 언젠가 할머니와 밥을 먹는데, 텔레비전에서 그런 말이 들려왔다. 전문가의 위엄 있는 목소리와 함께한 배경 화면은 한 4인 가족의 식사 장면이었다. 아이들은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 엄마는 잔소리만 한다. 아빠는 텔레비전만 본다. 그러다 서로의 행동을 지적하며 화낸다. 누군가가 진저리를 치며 방으로 들어간다. 남은 이들은 텔레비전만 바라보며 식사를 마친다. 극단적 사례에서 경각심을 느낀 나는 “할머니, 우리도 텔레비전 끌까?”라고 제안했다. 할머니는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듯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왜애?”라 되물었다. “아니야. 그냥 딴 데 보자. 할머니 보시고 싶은 거 봐.” 나는 할머니에게 리모컨을 내미는 것으로 대화를 포기했다.

그리고 얼마 뒤 추석. 올해 추석도 지금까지의 명절 때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역시나 일가친척끼리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바라본 것은 서로의 얼굴이 아니라 텔레비전이었다. “볼 게 없네?” 그랬다. 정말로 볼 게 없었다. “재미없네.” 그랬다. 정말로 재미없었다. 그래도 봤다. “채널 딴 데로 돌려봐.” 이런 말은 할지언정, 누구도 이제 그만 텔레비전을 끄자고 말하지는 않았다. 채널을 돌리다, 돌리다, 하도 볼 게 없어서 급기야 케이블 채널에서 해주는 미국 격투기 특집 방송까지 봤다. 이를테면 채널의 막다른 골목 끝에 다다른 셈이었다. 아버지가 아끼는 새 고화질 대형 텔레비전은 지나치게 우렁찬 서라운드 음향으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격투기 선수의 애인들이 쌍욕을 주고받다가 링으로 난입해 싸우는 촌극을 심드렁히 바라보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집에서 가족들과 밥을 먹을 때면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 텔레비전을 켰다는 사실을. 텔레비전의 소음은 식사에서 반찬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는 것을. 생각해보니, 혼자 밥 먹을 때마저 반드시 텔레비전을 켜두었다. 혹자는 패션의 완성이 얼굴이라고 했던가? 내게 ‘집밥’의 완성은 텔레비전이었다. 김치 없인 먹어도 텔레비전 없이는 못 먹었다. 심지어 텔레비전 없이 자취하던 시절에는 노트북에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을 저장해두고 밥 먹을 때마다 틀어놓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싶어 주위에 물어보니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텔레비전 없이 집밥을 먹고 싶다. 밥 먹다 말고 리모컨 붙든 채 이 채널 저 채널 방황하는 짓도, 연예인이 한우 먹는 걸 황홀하게 바라보면서 내 앞의 ‘간장계란밥’을 먹는 것도, 모처럼 이야기를 나눌라치면 텔레비전에 나온 색다른 무언가에 시선을 뺏겨 할 말을 잊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우리, 밥 먹을 때만이라도 텔레비전 좀 끄자. 처음에는 분명 너무 고요해서 이상한 느낌일 거다. 하지만 조금씩 진짜 대화를 나누게 될 거라는 확신이 든다. 지금 텔레비전에 나오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한 잡담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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