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덕수 무소속 대선 예비 후보가 2025년 5월5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국민의힘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야기가 등장인물의 구원과 몰락에 대한 것이라면 한국의 정치는 손색이 없다. 자기의 진실을 용기 있게 마주 대할 것인가, 비겁하고 뻔뻔하게 외면할 것인가. 마주한 진실이 보여주는 운명의 방향에 맞설 것인가, 그저 순응할 것인가. 진실을 받아들이되 자신의 운명에 맞선 자는 ‘구원’의 길을 가고, 진실을 끝까지 외면하거나 순응해버린 자는 ‘몰락’한다. 아주 일부는 진실과 운명을 거부하고 파멸해버리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런 점에서 12·3 계엄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적 행위자들은 정치인에서부터 지배 엘리트를 거쳐, 정당과 유권자 시민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자기의 진실을 마주 대해야만 했다.
‘국민의힘’(이하 국힘)에서 벌어진 대통령 선거 후보 교체 쿠데타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번 쿠데타는 국힘 지도부의 진실을 보여줬다. 이 정당의 뿌리가 ‘체육관 선거’에 있다는 진실 말이다. 민주적 절차에 의해 당선된 후보를 지도부가 몇 가지 절차적 ‘기술’을 발휘해 원하는 결과를 강제로 만들어내려 했다. 멀리는 유신과 전두환 군부 독재의 체육관 선거이며 가까이는 자기 마음에 드는 자가 대표가 될 때까지 압력을 행사하고 규칙을 바꾸던 대통령 윤석열이 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체육관 선거’일 뿐이다.
야밤의 후보 교체에서 의미 있는 수의 국힘 당원들은 이 당은 ‘근대 정당’이 아니라는 진실을 마주했다. 당원들은 국힘의 뿌리가 ‘체육관 선거’라는 진실과 그것이 근대 정당의 원리와 양립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바뀐 것처럼 보였지만 바뀌지 않았다’는 진실을 대면했기에 ‘거부’라는 행동을 선택할 수 있었다. 반면 지도부는 자신들이 획책한 것이 ‘체육관 선거’라는 변하지 않은 진실을 외면했다. 법적/제도적 술수를 부려 체육관 선거를 민주적인 것처럼 기만했다. 그리고 진실을 마주한 의미있는 수의 당원들에 의해 자신의 진실을 외면한 자들은 몰락했다. 사실 그들 중 누구도 바뀌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의 진실과의 대면에서 지도부와 당원들이 내린 결론이 달랐을 뿐이다.
한국의 지배(혹은 파워) 엘리트들은 어떠한가? 한국 지배 엘리트의 진실은 지독하게 인민주권을 부정하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나라는 자기들과 같은 인재, 엘리트들이 이끌어야 한다고 학습한다. 나라를 통치할 전문적 기술을 터득하고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자기들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통치의 대상일 뿐이다. 이들의 마음에는 정치의 주체인 시민은 없고 지배와 통치의 대상인 신민 혹은 말썽을 일으키는 우매한 대중이 있을 뿐이다. 이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민주주의를 경멸하고 경계한다.
그런 자신의 진실을 제도 뒤에 감출 수 있었지만 계엄 이후 이들은 이 진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지배가 무너질 수도 있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한덕수, 조희대와 같은 무리는 법의 허점을 파고들며 원칙의 이름 아래 요술을 부리려 했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이들은 “바람보다 먼저 눕지만 또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시민들의 힘을 하찮게 여기고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권력은 당연히 자기들에게 있고 그 권력을 독점할 ‘전문적 기술'을 독점한 것도 자신들이었으니 말이다. 근대 공화제 국가에서 인민주권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자신들의 진실을 법치와 절차라는 이름으로 외면하려 했다. 그리고 이들 역시 자신의 진실을 외면한 결과, 그 무시하던 민주주의와 인민주권에 의해 몰락했다.
한국 정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좋은 교훈을 준다. 이야기는 사람의 변화에 대한 것이 아니다. 좋은 이야기는 사람의 변화를 다루지 않는다. 이야기의 중심이 사람의 성장을 그가 외부적 사건을 겪으며 변화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시시한 이야기만 만들어진다. 주인공도 없고 사건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는 작품 초입에 등장인물의 성격과 처지, 그리고 시련이 제시되자마자 결말이 뻔히 보인다. 시작과 끝이 보이니 그 중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대충 짐작이 간다. (마치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 MMORPG)을 하는 사람들이 게임을 시작하려고 내려받자마자 자기가 어떤 ‘던전’에서 무슨 미션을 수행하며 대충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지 짐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주인공의 ‘변화’에 중점을 두면 기대하는 것과 달리 의외로 주인공은 단순하고 평면적이 된다. 욕망이 욕구 수준으로 떨어진다.(이번 국힘 쿠데타를 보라. 이른바 ‘쌍권’의 욕망은 얼마나 투명하게 단순하고 평면적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만일 변화가 A라는 상태에서 B라는 상태로 주인공이 이행하는 것이라면 주인공은 A일 때 그저 A일 뿐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마음속 욕망이 이미 갈등이 고조돼 있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극적’이지 않다. 이런 경우 극적인 것은 겨우 나중에 B로 바뀌었을 때다. 그의 변화는 외부의 충격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사건은 주인공의 외부에 있고, 주인공은 사건에 따라 그저 흔들린다.
오히려 재밌는 이야기는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할 때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보자.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재밌는 이유는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야기 전체를 두고 거의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은명의 경우를 보자. 드라마의 마지막에 애순이 시집을 발간한다. 택배로 온 그 시집을 집으로 들고 들어오며 은명은 이렇게 말한다. “보이스피싱이 아니었네. 출판사 놈들이 막판에 가면은 시집을 낼라거든 돈을 좀 보태라, 어? 난 막 이렇게 나올 줄 알았거든”이라고 말한다. 극의 초반부터 있던 은명의 성격이나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데 어떻게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이 ‘극적’이 될 수 있는가? 인물은 등장할 때부터 드러나지 않은 자신의 진실에 의해 극적으로 긴장한 상태여야 한다. 다만 등장인물 본인도 모르게 감추어져 있던 자신의 진실로 향하면서 점차 진실이 드러날 뿐이다. 그 진실이 결단을 요구하여 생애가 전환하는 것, 그것이 사건이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관식이 반 바퀴 돌아앉는 장면이다. 남자와 여자/아이들의 밥상이 따로 차려지던 때다. 좋은 음식은 남자들 상에, 남은 음식이 여자들 상에 놓였다. 관식이 딸 금명은 콩을 좋아하지만 여자/아이들의 밥상에는 콩이 없다. 관식은 밥그릇을 들고 주저하다 반 바퀴 돌아앉아 콩을 금명의 밥그릇에 올려준다. 그 유명한 ‘반 바퀴 혁명’이다. 이 장면이 ‘폭싹 속았수다’에서 가장 큰 생애전환의 사건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시청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 극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는 소소한 장면들에서도 등장인물들이 자기 ‘운명’의 진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저 운명에 순응하지는 않는다. 거부하지는 않되 운명에 맞선다. 금명은 충섭을 사랑한다. 그러나 금명은 또한 자기가 부모에게 속해 있으며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때문에 자기가 그동안 모은 돈을 털어 애순에게 주면서 맏딸로서 자기가 가졌던 무거운 짐에 대해 말한다. 벗어날 수 없어 답답하고 절망스러운 마음을 토로한다. 부모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 부모의 사랑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짐인지에 대해 ‘절규’한다.
금명은 부모에게 속해 있으며 벗어날 수 없다는 자신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벗어나고 싶은 욕망만큼이나 말이다. 금명은 부모에게 속해 있다는 것에 체념하고 순응하지만도 않았다. 금명은 그 운명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사실 많은 시청자가 이런 전개를 바라기도 했지만) 마주하며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금명이 자신의 운명을 마주하는 만큼 애순도, 관식도, 금명의 두 번째 사랑인 충섭도 그들이 엮어 그렇게 만든 금명의 운명을 마주하며 응답해야 한다.(물론 누군가에게 이는 불충분할 것이다. 여전히 금명이 가부장제에 포섭되는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응답하게 하는 것. 그것이 극적으로 금명과 영범의 운명을 가른다. 부모에게 속해 있다는 것에 체념하고 순응한 금명의 첫사랑 영범의 운명은 ‘몰락’으로, 금명은 끊임없이 연루된 모든 이에게 윤리적 응답을 요구하는 구원의 가능성으로.
이처럼 이야기는 몰락과 구원에 대한 것이지 주인공의 변화/발전에 대한 것이 아니다. 몰락이냐 구원이냐는 양자택일의 길에서 등장인물은 자신의 진실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외면할지를 요구받는다.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 진실이 말하는 운명에 맞서려 할 때 인간에게는 어떤 행동의 길이 열린다. 운명이라는 미래는 바꾸지 못하더라도 회개와 속죄와 용서는 있다는 에스에프(SF) 소설가 테드 창의 말처럼 말이다. 운명은 바꾸지 못하더라도, 사람은 바뀌지 않더라도 인간은 충분히 윤리적일 수 있다.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말이다.
반면 진실을 외면하거나 은폐하려고 할 때 등장인물은 운명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며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몰락’한다. 그저 하던 대로 할 뿐이다. 다만 그 ‘하던 대로’가 이전에는 자신의 진실은 물론 세상과 자기 자신까지 기만하고 은폐하는 기술이었지만,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에는 오히려 자기가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몰락으로 이끈다. 응답해야 하는 자들에게 응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하던 대로’ 하는 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 국힘 지도부도, 한덕수도, 조희대도 하던 대로 했을 뿐이다. 하던 대로 해서는 안 되는 때에 말이다. 그래서 ‘하던 대로’가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는 초유의 사건이 되고 그들은 인민주권을 부정하고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즉 시민들에게 응답하지 않는 자신의 진실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공화국의 적’으로 몰락했다.
이들의 몰락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남의 이야기로 치부하며 고소해하기만 할 것은 아니다. 공평하게도 모두는 각자 대면해야 할, 모르거나 외면하던 자신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진실의 순간에 ‘하던 대로’ 하면 그것이 초유의 사건이 되고 저들처럼 몰락할 것이다. 이미 온갖 진보적 구호는 다 늘어놓았지만, 당원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지난 20년간 ‘하던 대로’ 후보에서 사퇴한 진보당 김재연 대표와 그 지도부는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하던 대로’ 응답해야 할 사람들에게 응답하지 않는 자신들의 진실을 드러낸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대통령 선거에서 단 한 번도 찍은 사람이 당선돼본 적이 없는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내가 대면해야 하는 나의 진실은 무엇인가? 나는 내가 진보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진보정당에 ‘한 표’ 주는 것은 아닌가? 어떤 순간에는 나 역시도 ‘다음에’를 외치며 등을 돌릴 만반의 준비가 돼 있으면서. 그 ‘다음에’가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에’라는 말로 차례대로 들어줄 듯이 기만하는 것 말이다.
진보정당 역시 이번 선거에 들어가며 바뀌어본 적이 없는 자신의 진실을 마주해볼 것을 감히 요청한다. 공교롭게도 이번 진보정당의 이름이 ‘민주노동당’이다. 돌고 돌아 제자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불가피한 이름이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피함’이 진보정당이 그 난리를 겪고도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이것이 진솔한 고백이라면 나쁘지 않다. 우리 스스로를 솔직하게 객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늘 맴돌며 헤어지고 만나던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정치의 바깥에서 응답하는 사람들에게 나아갈 때다. 그럴 때 정치의 바깥에 있는 그들을 우리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응답해야 하는 ‘우리’ 밖으로 나가는 구원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무엇보다 민주당이 중도보수를 표방하며 왼쪽이 텅 빈 현실이지 않는가.

진보당 김재연 상임대표가 2025년 4월19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21대 대통령선거 후보 선출대회’에서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진보당 제공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소년범 의혹’ 조진웅, 배우 은퇴 선언…“질책 겸허히 수용”

트럼프가 이겼다…대미 3500억불 투자 손해, 자동차관세 절감 효과 2배

박나래, 상해 등 혐의로 입건돼…매니저에 갑질 의혹

쿠팡 손배소 하루새 14명→3천명…“1인당 30만원” 간다

법원장들 ‘내란재판부 위헌’ 우려에 민주 “국민 겁박” 국힘 “귀기울여야”

유시민 “통화·메시지 도청된다, 조선일보에 다 들어간다 생각하고 행동해야”
![[단독] 통일교 윤영호 “민주당 의원들에게도 자금 수천만원 전달” [단독] 통일교 윤영호 “민주당 의원들에게도 자금 수천만원 전달”](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5/53_17649329847862_20251205502464.jpg)
[단독] 통일교 윤영호 “민주당 의원들에게도 자금 수천만원 전달”

‘쿠팡 외압 의혹’ 당사자, 상설특검 문 연 날 “폭로한 문지석 검사 처벌해달라”

‘갑질 의혹’ 박나래, 전 매니저들 공갈 혐의로 맞고소

바다를 달리다 보면…어느새 숲이 되는 길















![[단독] 세운4구역 고층 빌딩 설계, 희림 등과 520억원 수의계약 [단독] 세운4구역 고층 빌딩 설계, 희림 등과 520억원 수의계약](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resize/test/child/2025/1205/53_17648924633017_17648924515568_2025120450403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