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대장의 시대다. 선출된 조직에서도 어디를 가나 민주주의적 대표자는 찾아보기 힘들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행동대장이다. 대표자는 자신이 대표하는 집단 내부의 차이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이 대표가 될 수 있도록 밀어준 특정 분파의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차이를 가진 그 집단 ‘전체’를 대표하고 대변하기 위해 그 분파에서 이탈해 내부 갈등을 중재하고 적극적으로 매개한다. 그래야 그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자는 자기 집단 내부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반드시 매개하는 역량을 필요로 한다. 매개는 단순한 중재와 다르다. 중재가 부딪치고 있는 서로 다른 입장들이 손실됨 없이 기계적인 합의점을 도출해내는 것이라면 매개는 차라리 모두를 뛰어넘는 새로운 제안을 생산하고 모든 당사자에게 제시한다. 매개자로서의 대표자는 새로운 안을 통해 갈등의 모든 당사자가 새로운 전망으로 자신을 보며 쇄신할 수 있도록 이끄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 앞에서 갈등하는 목소리‘들’을 하나로 ‘모으는’ 자가 아니라 그 목소리를 번역해 새로운 목소리로 ‘변형하는’ 사람이다. 부딪치던 당사자들은 대표자의 새롭게 제안된 목소리를 들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이익’이 보존된다는 사실만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소리의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며 좀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게 된다. 대표자를 통한 존재의 도약을 경험하면서 대중에게 눈앞의 작은 이익 따위는 하찮은 것이 된다.
말은 멋있어 보이지만 제안된 새로운 목소리가 하나의 목소리가 될 때, 이런 형태로의 변형·도약을 이끌어내는 대표자는 매우 위험한 대표자가 된다. 대표적인 것이 히틀러다. 그는 독일 시민들에게 독일의 이익을 앞세우기도 했지만 동시에 독일 국민에게 주어진 새로운 역사적 임무의 가치와 의미를 역설해 그들의 존재가 ‘도약’하는 경험을 하게 했다. 이 경험 앞에서 독일인들의 무수한 차이와 갈등은 무너지고 총통과 하나가 되어 독일 전체가 인류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범죄를 저질렀다. 그렇기에 ‘차이’를 무너뜨리고 ‘하나’로 도약시키고 묶어내는 변형으로서의 대표는 항상 파시즘의 위험을 내재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적 대표자란 자신이 대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다른 차원으로 도약시키되 그 차이를 완전히 무화하지 않고 보존해야 한다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매우 까다로운 요구를 받는 사람이다. 민주주의적 대표자는 그가 대표자인 한에서는 갈등의 단순 중재자인 것으로는 부족하다. 기계적인 공통분모만을 찾아내 중재하는 것만으로는 이 정치공동체에 진전이 없다. 대표자의 중요한 임무는 정치공동체가 진전하도록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정치공동체의 진전이 내부 활력에 따라 스스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부의 차이를 마비시켜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적 대표자는 앞서 말한 것과 달리 내부의 갈등과 차이가 진전의 힘이 되도록 변형하는 사람이지 차이를 마비시키고 통일된 하나의 목소리 자체를 제안하는 사람이 아니다. 새로운 전망의 목소리가 스스로 생산될 수 있도록 이끌어내 시민 내부의 차이가 변형 역량이 될 수 있도록 이익을 정치로 변형하는 것이 그의 역량이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적 지도자는 내부의 갈등과 적대를 외면하거나 무화시키거나 적당한 중간으로 중재하거나 하나의 통일된 목소리로 변형하는 것을 넘어 시민들 사이의 정치를 활성화하는 계기로 만든다. 활성화된 정치의 장으로 진입한 시민들은 분파적 이익을 지키는 것을 넘어 정치의 장에서 끊임없이 변형하여 새로운 것을 제안하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기며 그것을 통해 존재감을 획득한다. 정치적 존재로의 변형과 도약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민주주의적 대표의 위기가 발생할 때 한 축에서는 앞서 말한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나타난다. 이들은 시민들 내부의 차이를 말살하여 정치를 중단시키고 시민들을 외부와의 적대, 즉 전쟁을 수행하는 기계로 타락시킨다. 시민들은 자기 존재 의미와 가치가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도약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체에 흡수되는 것에 저항하는 변형 역량을 통해서만 발현·보존되는 자신의 고유함을 상실하고 타락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적대는 주체를 그저 흥분시키기만 할 뿐이고 흥분된 시민은 사실은 정치적으로 마비된 존재다.
다른 한편에서 민주주의적 대표자를 대체하는 것이 행동대장이다. 이들은 내부 갈등을 중재·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확대하고 재생산한다. 갈등이 적대로 확산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내부에서 자신을 지지한 가장 강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대표하는 것이다. 이들의 지지를 지속적으로 받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는 전체의 대표가 되는 것을 포기한다. 전체의 대표가 되기를 포기한다는 점에서 그는 대표자가 아니며 그가 내는 목소리는 전체의 대변도 아니다. 대표도 대변도 포기한 그는 강성 분파 목소리의 ‘확성기·스피커’가 되는 것을 자임한다. 행동대장이다.
목소리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행동대장의 가장 큰 역할은 중재도 매개도 아니다. 확성기라고 말한 것처럼 증폭이다. 증폭되어 들리는 것은 새로운 목소리도, 통일된 목소리도 아니다. 변형 없이 단지 증폭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증폭을 강성 분파는 즐긴다. 따라서 이들이 자신의 ‘대표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간단하다. 내 목소리를 변형 없이 증폭하라! 이들은 변형을 용서하지 않는다. 증폭에 조금이라도 변형이 있으면 조금 전까지 열광하다가도 삽시간에 차갑게 식어 단호히 자신의 ‘대표자’를 응징하고 갈아치운다. 사실 그는 ‘대표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행동대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행동대장들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선출 과정에서부터 대표자가 아니라 행동대장이 될 것을 마다치 않는다. 내부의 차이와 다른 목소리를 듣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강성 분파의 행동대장이 되겠다고 스스로 나선다. 특히 적대가 격화된 상황에서는 이렇게 행동대장이 되겠다고 나서야 ‘대표자’로 선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출된 행동대장은 결코 그 분파로부터 떠나지 않는다. 그 분파를 떠나야 ‘대표자’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은 곧 대표자 자리에서 끌려 내려오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미국 하원의 공화당에서 벌어진 일이다. 2023년 10월 공화당의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은 미국 의회 사상 최초로 해임당했다. 공화당 강경파가 그의 해임안을 발의했고 공화당 강경파 8명이 찬성해(민주당이 전원 찬성해 과반을 함으로써) 해임안이 가결됐다. 강경파가 그를 해임한 것은 그가 하원의장으로서 적극적으로 민주당 정부와의 ‘적대’를 중재했기 때문이다. 강경파에게 민주당과의 적대는 증폭되고 파국으로 가야 할 사안이지 중재돼 멈춰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하원의장에게 바란 것은 한국적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 ‘스피커’(Speaker)였지 대표자(Representative)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뒤 하원 다수인 공화당이 선출한 하원의장은 자신과 강경파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무엇보다 잘 알게 됐다. 그들의 목소리를 증폭해 전달하는 스피커, 즉 행동대장이 되는 것이지 대표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정치를 저지하고 적대를 확대재생산해 강경파를 즐겁게 하는 그들의 스피커, 행동대장이 되는 것만이 정치인으로 그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다. 비극적이지 않은가? 행동대장의 시대에 정치인의 생존 방법이 정치의 저지라는 것이 말이다.
한번 강경파의 목소리가 제도 내에서 증폭되기 시작하면 이들에게 ‘낙점’받은 행동대장은 선출 과정 자체를 지속적으로 강경파의 목소리가 과대 대표될 수 있도록 왜곡해버린다. 팟캐스트 방송 <삼프로티브이>에서 잘 다뤘던 것처럼, 남부를 중심으로 미국에서 공화당 강경파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된 것은 그 지역에 극단적 보수주의자가 많아진 것보다는 그렇게 선출될 수밖에 없도록 선거구 조정 등 제도를 바꾼 것이 결정타였다. 그 뒤에는 모두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의사협회 같은 직능단체부터 정당,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나 보건복지부 같은 국가기관, 그리고 국가 자체에 이르기까지 임명직은 말할 것도 없이 선출직들이 대표자가 아니라 행동대장처럼 말한다. 형식적으로라도 적대를 정치로 변형하는 대표자로서의 중재와 매개의 언어를 구사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강경파의 환심을 사기 위해 파괴하고 있다. 표현이나 비유, 사례에 거침이 없다. 오히려 될 수 있는 한 거침없이 더욱 극단적이고 혐오스러운 것을 일부러 찾고 구사하며 적대를 혐오로 확대재생산한다.
따라서 무엇보다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저지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행동대장들의 ‘입’이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는 우리의 대표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강력하게 저지해야 한다. 단지 표현을 순화해 정치의 품위를 지키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적대로 먹고사는 행동대장의 시대가 작은 단체부터 나라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전방위적으로 본격화해 정치(시민들이 변형하고 제안하는 것을 즐기며 정치적 존재로 고양되는)가 중단되는 것을 저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영역에서 이 행동대장들의 목소리를 저지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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