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비례대표 선출 방식을 두고 이 난리가 난 것은 2023년 11월2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자신의 유튜브 라이브에서 한 발언 때문이었다. 이날 이 대표는 차량 안에서 찍은 유튜브에서 “선거는 승부 아닙니까? 이상적 주장,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 있겠어요? 국회까지 지금 집권여당으로 넘어가면 지금 이 폭주, 과거로의 퇴행, 역주행을 막을 길이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준연동형)를 버리고, 과거의 ‘병립형 비례대표제’(병립형)로 돌아가겠다는 뜻으로 여겨졌다.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1998년 이후 민주당 대통령들의 정책이었고, 2019년 이후 민주당의 당론이었고, 2022년 대선 공약이었는데 말이다. 앞서 민주당은 2023년 9월1일 의원총회에서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엔 준연동형을 유지하고, 지역구 의석을 줄여 비례대표를 늘리며, 비례성과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방안을 함께 추진했다. 과거의 병립형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었다.
이 대표의 발언이 나온 뒤, 민주당 안의 논의는 봇물이 터졌다. 11월30일 민주당 의원총회에선 의원 28명이 발언에 나섰는데, 준연동형 유지와 병립형 회귀 사이에서 의견이 팽팽히 갈렸다. 총회가 끝난 뒤 홍익표 원내대표는 “특정 제도가 선이고 악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준연동형) 약속을 파기할 경우 사과하거나 합당한 이유를 제시할 필요가 있고, (준연동형)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고 말했다.
이 대표의 발언 뒤 민주당 지도부는 병립형으로 기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12월4일 홍 원내대표는 2022년 대선 때 이재명 후보가 공약한 ‘같은 지역구 3선 초과 금지’ 정책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 은퇴 번복’을 거론하며 준연동형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이날 이 대표의 정무조정실장인 김영진 의원은 “권역별 병립형 비례제를 적극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역별 병립형’은 병립형으로 하되 전국이 아닌, 수도권(16석), 중부권(충청·강원·경북 15석), 남부권(호남·경남·제주 16석) 등 3개 권역으로 나눠 비례대표를 뽑는 방식이다.
민주당 내 비판 모임인 ‘원칙과 상식’의 김종민 의원은 “권역별 병립형으로 비례대표를 뽑으면 양당이 더 많은 의석을 가져간다. 소수정당들의 의석은 사라질 것이다. 최악의 탐욕 선거가 된다. 현재의 적은 비례대표 의석으로 권역별 병립형을 하면 지역주의 타파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권역별 병립형을 통한 영호남 지역주의 극복은 시대정신이 아니다. 철 지난 이야기다. 지금의 시대 과제는 총인구 감소, 기후위기, 에너지·식량 문제, 사회보장 등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선거와 정치를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지도부가 병립형 회귀로 기운다는 이야기가 많아지자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전환점이 된 것은 12월11일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매체 <민들레>에 기고한 글 ‘비례 위성정당 문제에 대하여’였다. 유 전 이사장은 이 글에서 민주당이 준연동형을 도입한 것은 잘한 일이며 병립형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 또 준연동형을 유지하면서 ‘자매정당’을 만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 자매정당은 민주당이 만들지 않는 우호적 비례정당으로 선거 뒤 민주당과 합당하지 않고 원내에서 협력하는 정당을 말한다 .
12월13일엔 초선인 이탄희 의원이 제22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준연동형을 지켜달라, 위성정당 방지법을 만들자고 호소했다. 이 의원은 “국민의힘과 야합해 병립형으로 돌아간다면 국민의 정치 혐오를 자극해 253개 지역구 선거가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12월14일 열린 의원총회에선 준연동형을 지켜야 하고 병립형으로 돌아가선 안 된다는 의견이 더 많이 나왔다.
12월19일엔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인 우원식 의원이 병립형의 대안인 비례연합정당의 구체적 방안을 제안했다. 우 의원은 “민주당이 지역구 정당의 주력을 맡고, 여러 (민주진보) 정당이 합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비례연합정당으로 힘을 모으자”고 말했다. 윤석열 정권 심판에 역량을 총결집하자는 말이었다. 비례연합정당은 소수정당에 적극적 배려를 해서 민주당 비례대표 후보를 뒷순위에 배치하자고도 제안했다. 이는 민주당 지지 그룹의 사표를 방지하고 소수정당의 의회 진출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2월20일엔 김부겸 전 총리가 이 대표를 만나 준연동형 유지를 요구했다. 김 전 총리는 “현행 연동형 비례제는 다양성과 비례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이니 기본적 취지는 지켜주는 게 좋다. 이 대표가 범민주 진영의 대표자로서 의견을 잘 수렴해달라”고 말했다. 유시민 전 이사장의 글, 이탄희 의원의 불출마 선언, 우원식 의원의 제안, 김부겸 전 총리의 발언 등이 이어지면서 민주당 내부에서도 병립형 회귀는 어렵겠다는 분위기가 확산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의 민주당 간사인 김영배 의원은 “윤석열 정권 심판(병립형)도 필요하고, 정치개혁(준연동형)도 필요하다. 그러나 병립형은 과거로의 회귀여서 과연 우리가 이런 제도로 선거를 치를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이관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정치학)는 “국민의힘 쪽에서 정치학자들이 모두 준연동형에 찬성하는 것을 보고 편파적이라 비판했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 정치학자 가운데 현재 병립형에 찬성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병립형은 현재 거대 양당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것이고, 나쁜 정치 쪽으로 가는 것이다. 민주당이 그런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민주당 지도부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비례연합정당과 권역별 병립형 정도다. 그중 비례연합정당 방안이 유력해 보인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하나는 비례진보연합을 추진하는 정의당과 진보당, 녹색당, 노동당 등이 비례연합정당을 받아들일까 하는 것이다. 특히 민주당과 협력해 준연동형을 도입했고, 2020년 총선에서 위성정당 문제로 민주당과 충돌한 정의당의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정의당 배진교 원내대표는 “민주당이 2020년 총선에서 위성정당을 만들었고 반성했고 준연동형 유지를 대선 공약했다. 그것을 지키면 된다. 정의당은 민주당이 입장을 결정하면 거기에 맞춰 대응하겠다. 총선과 관련해 민주당과 논의할 수 있지만, 비례연합정당에 민주당이 직접 참여한다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위성정당 논란이 다시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하나 문제는, 소수 진보 정당들과 비례연합정당 구성에 합의할 경우 민주당이 어느 정도까지 양보할 것인가다. 애초 준연동형의 도입 취지나 2020년 민주당의 위성정당 논란을 고려할 때 민주당의 큰 양보가 필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양보 방안은 우원식 의원이 제안한 민주당 비례후보 뒷순위 배치다. 이 경우 민주진보 진영 전체가 당선 가능한 25번까지에서 적어도 15번 이하로 내려가야 할 것이다.
민주당이 가져가는 의석수를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준일 <뉴스톱> 수석에디터는 “당선 가능한 순위 안에서 민주당이 다른 참여 정당들과 똑같이 n분의 1로 의석을 나누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당선할 수 있는 비례 순위가 25번까지이고 참여 정당이 5개라면, 민주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이 5석씩 가져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민주당과 소수 진보 정당들 사이에 이렇다 할 협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의당은 4개 진보 정당들 사이의 선거연합신당 문제를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상태다. 또 민주당도 위성정당 논란을 우려하는 탓에 먼저 비례연합정당을 제안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범민주진보 비례연합정당의 성사 여부는 진보 정당의 전향적인 참여 의사와 민주당의 전향적인 양보에 달려 있다.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를 지낸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는 “기본적으로 민주당이 스스로 약속한 준연동형을 유지해야 하고, 위성정당을 따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비례연합정당과 관련해선 진보 정당들과 논의해서 결정하면 된다. 민주당이 병립형으로 돌아가거나 위성정당을 만든다면 소탐대실의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준일 수석에디터도 “민주당이 이기려면 진보 정당들과 연합해야 하고, 지지자들이 투표장으로 나올 명분을 만들어줘야 한다. 민주당이 2024년 총선만 보고 병립형으로 돌아간다면 2027년 대선에서 다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은 민주당의 오랜 개혁 과제였다. 1998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은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 전신) 지도부와 만나 지역 분할 구도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소선거구제와 지역별 비례대표제를 혼합한 독일식 정당명부제 도입을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또 노무현 대통령은 선거제 개혁을 위해 2003년 국회 다수당이 총리를 추천하게 하고 총리에게 내각 지휘권을 주는 ‘동거정부’를, 2005년엔 야당이 주도권을 갖는 ‘대연정’을 제안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염두에 둔 선거제는 독일식 국회의원 선거제도(연동형 비례대표제)나 중대선거구제였다.
심지어 이재명 대표도 대선 후보였던 2022년 2월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대 양당 체제 속에서 우리 민주당이 누려온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겠습니다. 표의 등가성이 보장되는 선거제 개혁으로 제3의 선택을 통한 선의의 정책 경쟁이 가능하게 하겠습니다. 비례대표를 확대하고, 비례대표제를 왜곡하는 위성정당 반드시 금지시키겠습니다. 피해를 입은 정당들에 다시 한번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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