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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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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은 왜, 팬덤정치에 휘둘리는가

팬덤이 지배하는 정치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거대한 ‘무책임의 체계’로 이어져
등록 2022-04-23 18:26 수정 2022-04-27 07:5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신진욱의 질문
더불어민주당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당론 채택 과정에서 팬덤의 위력이 확인됐다. 정당과 정치인은 왜 팬덤과 강성 지지층의 압력에 취약한가.(제1409호)

“그러나 누구인가 당은/ 전화가 있는 건물에 앉아 있는 것이 그것인가/ 그 생각은 비밀이고 그 결정은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인가/ 누구인가 그것은// 우리들이다 그것은/ 당신이고 나고 당신들이다- 우리 모두인 것이다”(베르톨트 브레히트, ‘그러나 누구인가 당은’ 중에서)

팬덤과 열성 당원들의 조직적 압력에 휘청대는 더불어민주당을 보면 귀때기 새파랗던 시절에 읽은 브레히트(1898~1956)의 시가 떠오른다. 1950년대 동독 공산당의 경직된 비밀주의를 겨냥한 것으로 짐작되는 이 시는 ‘전사 시인’ 김남주의 번역으로 1988년 초판이 나온 시선집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에 실려 있다.

당원 발언권이 커지니 당심과 민심의 괴리도 커져

이 시를 처음 접한 곳은 1990년대 중반 신좌파 학생 그룹에서 유통되던 정치 팸플릿이었다. ‘민주주의와 함께 가는 사회주의’라는 슬로건 아래 구좌파 정당들의 관료주의를 비판하며 내부 민주주의의 강화를 역설하는 내용이었다. 숨 막히는 레닌식 ‘민주집중’의 원리 대신, 이견이 허용되는 토론, 아래로부터의 참여를 통해 움직이는 민주적 사회주의 정당이라니, 생각만 해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 시절 우리가 동경했던 정당 민주주의는 2000년대 한국의 리버럴 정당에서 핵심적 당내 개혁 의제로 떠올랐다. 사실상 최초의 정치인 팬덤이었던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이 ‘난닝구’(호남 기반 당권파)가 지배하는 민주당의 체질을 바꾸려면 안에 들어가 당을 접수하는 길밖에 없다며 대대적 입당 운동을 펼치던 시절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의 인기 하락과 민주당 분당, 대선·총선 참패를 겪으며 그런 움직임도 유야무야됐다.

‘당원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내걸고 특정 정치인을 중심으로 뭉친 열성 지지자들이 당 지도부와 공직 후보자 선출, 당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건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가 보편화되고 모바일 투표라는 새로운 참여 수단이 확보되면서다. 투철한 팬심과 비상한 사명감으로 무장한 모바일 전사들이 민주당의 당원 게시판과 온라인 커뮤니티를 휩쓸며 당의 여론을 움직였다.

2012년 문재인의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 새정치민주연합 시절의 친문-비문 계파 갈등, 문재인과 박지원이 당권을 두고 격돌한 2015년 전당대회와 2016년 분당에 이르는 중대 고비마다 이들이 펼친 활약은 눈부셨다. 온라인 좌표 찍기, 게시판 댓글 도배, 특정인을 겨냥한 문자 폭탄이 무기였다. 이들의 조직된 힘이 필요했던 정치인들은 네트워크 정당, 모바일 정당, 시민참여 정당 같은 정당개혁 담론으로 화답했다.

문제는 열성 당원과 팬덤의 발언권이 커질수록 ‘당심’과 ‘민심’의 괴리도 함께 커졌다는 사실이다. 지난 대선에서 패배한 뒤 더불어민주당이 벌이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속도전’ 역시 지지층 여론(당심)과 일반 여론(민심) 사이에 온도차가 적지 않다. 리얼미터가 2022년 4월13일 전국 유권자 1017명에게 벌인 여론조사에서도 ‘검수완박’에 대한 찬반 분포는 52 대 38로 반대가 우세했다(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대선 직후 분출되던 성찰과 쇄신의 목소리는 ‘검수완박’을 향한 이상 열기에 묻혀 더는 들려오지 않는다. 2021년 4·7 재보궐선거 참패 뒤 민주당이 보인 모습과 달라진 게 없다. 당시의 재보선 민심을 ‘민생 이슈에 집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소수파의 목소리는 ‘더 철저한 검찰·언론 개혁이 필요하다’는 당 주류와 강성 권리당원들의 기세에 힘을 잃었다.

정당 내부 민주주의와 대외 경쟁력은 별개

‘정당이 얼마나 민주적이어야 하는가’는 지도부와 당원, 다수파와 소수파 사이의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논쟁의 최전선에 불려나온 주제다. 극단적 당원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쪽에선 ‘당내 민주주의 없이 당 밖의 민주주의도 없다’는 견해를 고수한다. 그러나 조반니 사르토리(1924~2017)나 엘머 에릭 샤츠슈나이더(1892~1971) 같은 현실주의 정치학자들은 민주주의를 ‘정당 간 상호경쟁’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결과물로 본다. 국가라는 정치공동체에 중요한 것은 ‘정당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이지 ‘정당 내부의 민주주의’는 아니라는 얘기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정당 안이 아니라 정당 사이에 있는 것”(샤츠슈나이더)이다.

물론 내부 운영이 민주적이면 정당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가 커지는 장점이 있다. 문제는 내부 민주주의가 잘 작동한다고 해서 그 정당의 대외 경쟁력까지 함께 상승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오늘날 당내 민주주의가 강조되는 정당이 어떤 곳인지를 봐도 알 수 있다. 대부분 사회운동조직에 뿌리를 둔 운동정당이나, 규모가 작은 계급·이념정당이다. 한국에선 녹색당, 정의당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당에는 집권이 아닌 정치적 영향력 확대가 최대 관심사다.

그러나 집권이 목표인 정당이라면 달라야 한다. 다수 유권자의 선호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 흐름에 신속하게 반응하는 게 필수다. 하지만 집권을 노리는 규모 있는 원내 정당들에서도 당심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당원 권리의 확대를 요구하는 움직임은 끊이지 않는다. 2012년 이후 민주당에서 공직·당직 선거의 흐름을 좌우한 것도 활동력이 왕성한 열성 당원들과 특정 정치인을 중심으로 뭉친 정치 팬덤이었다.

그렇다면 대규모 정치조직인 현대 정당은 왜 소수의 강경파와 적극적 팬덤에 취약한가. 다름 아닌 ‘참여의 격차’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대의정치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선 시민이든 당원이든 아래로부터의 참여가 필요하다. 거기엔 적잖은 비용이 든다. 시간과 노력, 열정을 가진 소수만이 정당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참여의 문턱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는 건 확고한 정치 신념의 힘이기도 하다. 신념에 대한 이들의 헌신은 종교적 열정에 견줄 정도다.

티파티에 휘둘리던 미국 공화당의 ‘조직화된 침묵’

이들은 소수임에도 자기들보다 100배는 많은 일반 당원이나 지지자들보다 뜨겁고 적극적이며 희생적이다. 당적을 가진 정치인 팬덤 한 사람이 어쩌다 당내 투표에 참여하는 일반 당원 100명 몫을 능히 감당해내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눈 밖에 나면 아무리 선수가 높고 경험이 풍부한 중진 정치인도 정치생명을 속수무책으로 위협받는다.

이런 현상은 한국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버락 오바마 정권 시절, 미국 공화당의 의사결정을 쥐락펴락한 것은 소수의 ‘티파티’였다. 의원들은 티파티에 찍힐까봐 전전긍긍했다. 2013년 10월 ‘오바마케어 폐지’를 요구하며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 사태를 초래했다가 거센 역풍을 맞은 것도 티파티의 압력에 떠밀린 결과였다. 이후 공화당 안에서도 ‘더 이상 티파티에 끌려다녀선 안 된다’는 우려가 커졌지만 누구도 이를 공론화하지 못했다. 응징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아무리 떠들어도 달라질 게 없으리라는 체념과 절망감이 만들어낸 ‘조직화된 침묵’이었다.

팬덤과 당내 강경파에 휘둘리는 요즘 민주당의 정치 행태를 ‘파시즘’ 틀로 해석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하지만 적정 수위를 넘어선 ‘지도자 숭배’와 ‘희생자 의식’, ‘정치적 공격성’ 등의 양태는 ‘역사적 파시즘’보다는 ‘팬덤정치’ 일반의 특성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지난 몇 년간 민주당의 중요한 의사결정에서 보인 도착과 전치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는 전전(戰前) 일본의 통치 메커니즘을 해부한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의 분석틀이 유용해 보인다.

마루야마가 볼 때, 팽창기 일본의 대외정책에서 극단 노선을 주도한 것은 내각과 군부의 고위층이 아니라, 정권 주변의 우파 낭인과 강경 지지 세력에 연결된 중간 실무자, 하급 장교 그룹이었다. 내각과 군의 수뇌부에는 책임정치에 필요한 자발성과 책임의식이 부재했다. 수뇌부를 구성하는 인물들은 통치에 필요한 권위를 오직 ‘절대적 가치의 중심’인 최고지도자(천황)로부터의 물리적·감각적 근접성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이재명 팬덤의 원형 격인 문재인 팬덤의 작동 구조 역시 이와 유사해 보인다. 노무현에서 문재인으로 승계된 ‘절대적 권위’를 중심축 삼아 권력이 동심원을 그리며 분배되는 위계 구조 속에서, 각 단계의 권력 주체들은 정당성의 원천을 자기 내부에 갖기보다 ‘중심으로부터의 거리’에 의존한다. 위계 서열을 이루는 각 주체의 자발성과 책임의식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다. 그 결과 중심의 권위가 약해질수록 각 단계의 의사결정은 ‘하부로부터의 압력’에 취약해진다. 위기가 닥치면 아래로부터 불만의 역류를 막기 위해 무책임한 여론에 편승해 즉흥적 의사결정을 남발하는 것이다. 임기 말이 다가올수록 팬덤과 밀착도가 높은 중하위 그룹이 ‘개혁 완수’와 ‘지도자 수호’를 명분 삼아 지도부를 흔들고, 당 전체의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배경이다.

누구도 결정에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의 체계’

팬덤이 지배하는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잘못된 결정의 책임을 묻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데 있다. 지도부는 자신들을 압박한 소장 그룹에, 소장 그룹은 다시 강성 팬덤에 책임을 미루지만, ‘익명의 다수’는 책임질 수 없고, 책임을 이양할 대상도 없다. 그 결과 목격하는 것은 누구도 결정에 책임지지 않는 거대한 ‘무책임의 체계’다. 이런 상황에서 ‘리더십과 팔로어십의 조화’니 ‘시민·당원의 자발성과 지도부의 책임성 사이의 균형’ 같은 교과서적 대안은 공허하게 들린다.

70년 전 시인의 직관에 기대를 걸고, 먼지 앉은 시집을 다시금 펼쳐본다. 길은 역시 ‘책임 있는 결정’과 ‘부단한 소통’, ‘진심 어린 설득’ 외에 없다는 얘긴가.

“당신이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면 우리들은/ 당신과 함께 그 길을 간다 그러나/ 바른 길도 우리를 빼고는 가지 말라/ 혼자서 가는 길은/ 가장 옳지 않은 길이다/ 우리들과 떨어져서 가지 말라!/ 우리들이 잘못이고 당신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과 떨어져서 가지 말라!”(브레히트, 앞의 시 중에서)

이세영 <한겨레> 논설위원

이세영의 질문
우리 사회의 경제적 격차와 불안정성이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선 때나 선거 이후에나 이 문제는 이슈가 되지 않고 있다. 한국에는 계급정치의 사회적 토대가 전혀 없는 것인가? (제1412호로 이어집니다.)


*신진욱X이세영의 정치크로스: 정치사회학자인 신진욱과 정치부 기자 출신인 이세영이 한국 정치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의 정치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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