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은 가족·친구와 모일 수 없으니, ‘정치 대목’이라는 설 명절에도 조용한 선거 분위기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선거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감정 상하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지만, 여론 형성과 시민 대표 선출이라는 선거의 효능을 떨어뜨리는 부작용도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 이번 설에는 만날 수 있는 몇 명하고라도 선거 이야기를 마구 나눠보자. 풍성한 ‘대화’ 상차림을 위해 명절에 만날 수 없는 가족과 친구의 마음을 <한겨레21>이 먼저 들었다. 새로 시장을 뽑는 서울과 부산에서 유권자들을 만났다. 다양한 갈래의 이야기를 모으니, 유권자의 마음이 2021년 재보선을 넘어 2022년 대선에서 어디로 향할지 어렴풋이 보이는 듯도 하다._편집자 주
“일자리가 없어 젊은 청년들이 부산을 빠져나간다고 난리인 마당에 부산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후보와 정당을 밀어야 하지 않겠냐. 투표에 관심도 없었는데 가덕도 신공항 때문에 민주당을 적극 지지하고 싶다.”(부산 북구 구포동 30대 주민)
“다른 선거면 민주당을 지지하지만 이번 보선만큼은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줄 수 없다. 오거돈(전 부산시장)을 후보로 내세워 23년 만에 정권 교체를 했다고 자평하던 민주당은 이번 보선에서 부산 시민을 농락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부산 남구 용호동 40대 여성)
4·7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부산 정권을 수성하려는 더불어민주당과 정권 탈환에 나선 국민의힘 소속 후보들이 ‘부산 격전’에 들어갔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성추행을 저질러 사퇴하면서 치르는 이번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는 새 부산시장의 역할은 막중하다. 지난 1년 동안 ‘진공상태’였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는 부산시를 재정비하고, 먹고살 만한 일자리는 갈수록 줄고 한창 일할 나이의 젊은 세대가 부산을 빠져나가는 ‘도시 부산’을 구해야 하는 필연적 과제를 안고 출발해야 하는 까닭이다. 선거를 60여 일 앞둔 2월2일과 3일, 2020년 4월 총선에서 여야 격전이 펼쳐진 세 곳의 선거구(부산 남구을·사하갑·북강서갑)에서 유권자들을 만났다.
지난 총선에서 부산 남구을 선거구는 더불어민주당 박재호 의원이 50.5%, 이언주 전 의원(옛 미래통합당)이 48.7% 득표율을 보이며 전국에서 손꼽히는 격전지로 기록됐다. 특히 박 의원은 개표 내내 이 전 의원에게 밀리다가 막판 역전에 성공했다.
지난 총선에서 남구을과 함께 최대 격전지였던 부산 사하갑과 북강서갑 선거구 유권자들은 가덕도 신공항 추진 여부에 큰 관심을 보였다. 사하갑에서는 민주당 최인호 의원이 득표율 50%를 기록해, 통합당 소속 김척수 전 부산시의원에게 0.87%포인트 차이로 신승했다. 북강서갑도 민주당 전재수 의원(50.5%)이 통합당 박민식 전 의원(48.5%)에게 개표 내내 고전하다 마지막에 승패가 가려진 선거구다.
2020년 말까지만 해도 이번 보선은 ‘일방적 게임’, 즉 국민의힘에 유리한 형국으로 치를 공산이 크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직원을 성추행해 사퇴한 오거돈 전 시장의 책임론이 거세리라는 예상이 대체로 많았다. 실제 국민의힘 소속 예비후보(출마 예비자)들과 지지자들에게선 ‘부산시장은 다 잡은 물고기’라는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부산 지역 민심이 요동치면서 여야 격돌이 예상된다는 신호가 잇따른다.
리얼미터가 YTN 의뢰로 1월25일과 29일 전국 18살 이상 251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부산·울산·경남의 정당 지지도는 국민의힘이 전주보다 6.9%포인트 오른 35.6%로 민주당(2.4%포인트 오른 33.7%)을 근소하게 앞섰다. 리얼미터는 “양당 내부에서 선거 분위기가 고조되자 지지층 결집력이 높아진 양상”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총선 때 민주당 박재호 의원과 당시 통합당(현 국민의힘) 이언주 전 의원의 빅매치가 펼쳐진 부산 남구을 선거구에 거주하는 한 상공계 인사는 현 정부와 민주당을 성토하면서도 “원래부터 국민의힘 후보를 지지했고, 정서상 이번에도 국민의힘을 지지할 생각인데 왠지 모르게 (후보들에게) 정이 안 간다”며 “당초 이번 선거를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 새로운 인물도 없고, 그렇다고 임팩트 있는 후보도 안 보여 아직 결정을 못하겠다”고 전했다.
반면 오거돈 책임론은 여전히 유권자 마음을 흔든다. 60대 주민은 “줄곧 한국당(국민의힘 전신) 계열만 찍었는데, 지난 선거에서는 박재호가 하도 열심히 일해서 투표 당일까지 갈등하다가 그래도 이언주를 찍었다”면서도 “하지만 이번에는 고민 없이 국민의힘이다. 오거돈이 부산시를 망쳐놓고 치르는 선거 아니냐”고 이야기했다. 민주당의 콘크리트 지지층이었다는 40대 여성도 “아직도 오거돈의 성추행 사건으로 인한 충격과 상처가 가시질 않는다”고 바뀐 견해를 표현했다.
실제 이 여성들처럼 오거돈 책임론을 언급하는 시민 가운데는 민주당 강성 지지자가 여럿 있었다. 지난 총선에서 처음 투표권을 행사했다는 대학생 ㄱ씨도 “다른 것은 몰라도 오거돈이라는 사람 때문에 선거하는 것인데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다만 민주당이 밉다고 국민의힘을 찍자니 썩 내키지 않아 고민인데, 후보를 보고 지지 여부를 결정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오거돈 책임론으로 밀리던 민주당이 던진 민심 반전 카드는 가덕도 신공항이다. 민주당은 1월29일 새해 첫 현장 최고위원회 회의 장소로 부산을 택했다. 이낙연 대표가 1월21일 부산을 방문한 지 8일 만으로, 당 지도부가 총출동해 여당이 부산 현안을 해결할 ‘적임자’라는 점을 부각했다. 아울러 민주당은 재차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 처리를 약속하며 신공항 표심을 흡수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앞서 2018년 지방선거에서 나란히 승리한 민주당 소속 오 전 시장과 김경수 경남도지사, 송철호 울산시장은 동남권 관문공항(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위한 ‘견고한 부울경(부산광역시와 울산광역시, 경상남도) 연대’를 구축했다. 당시 <국제신문>과 <부산일보> 등 지역 언론은 가덕도 신공항 건설이 부산의 미래가 될 것이라며 이런 부울경 연대를 적극 지지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실세인 김 지사의 적극적인 가세로 “또 신공항 이야기냐”며 피로도를 호소하던 여론도 예년보다 잦아들었다.
이런 가운데 최근 국민의힘 ‘투 톱’인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가 2021년 들어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 처리를 통한 신속 추진 방침에 반대 입장을 보이면서 부산 지역 민심이 들끓었다. 김 위원장은 “가덕도 공항 하나 한다고 부산 경제가 확 달라진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대구에 지역구를 둔 주 원내대표도 더불어민주당의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 2월 처리 움직임과 관련해,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치지 않고 사업하는 악선례를 남기는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특히 주 원내대표의 발언은 지역 언론으로부터 과거 인천국제공항도 ‘수도권 신공항건설 촉진법’이라는 특별법으로 추진된 점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전형적인 반대 논리를 답습한다고 비판받았다. 민주당은 이런 분위기를 파고들며 가덕도 신공항 드라이브를 더욱 강력하게 걸면서 지역 표심을 자극했다.
국민의힘 예비후보들은 “지역 이슈가 아닌 대한민국 전체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박형준 동아대 교수)라고 중앙당을 비판했고, 이언주 전 의원은 급기야 중앙당이 가덕도 신공항을 공개 지지하지 않는다면 부산시장 도전을 철회하겠다는 배수진까지 쳤다. 오거돈 성추행 사건보다 가덕도 신공항을 내세운 지역경제 발전 논리가 시장 선거 구도를 뒤흔든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민주당 부산시당 관계자는 “가덕도 신공항이 선거 이슈로 부상하면서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솔직히 말해, 일방적으로 케이오(KO)패는 당하지 말고 최소한 득표율 격차를 줄이는 선거를 해야 한다는 게 보름 전까지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한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당과 지지자들 사이에 퍼진 상태다”라고 전했다.
실제 가덕도 신공항은 유권자들의 표심에도 중대한 변수로 자리잡은 분위기였다. 사하구에서 업체를 운영하는 50대 기업가는 이런 속내를 털어놨다. “원래부터 민주당이 싫었고, 또 이번 선거는 오거돈 전 시장 때문에 치러져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주면 안 되지만 부산의 미래,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가덕도 신공항을 건설해야 하기에 국민의힘을 지지하기가 싫다.”
사하구 토박이라는 70대 유권자는 “지난 시장 선거에서 오거돈 전 시장 말고 서병수(현 국회의원, 전 부산시장) 당시 시장을 찍었는데, 신공항 문제 때문에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주고 싶다”며 “우리 딸과 사위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가덕도 신공항이 건설돼야 한다고 이야기하기에 들어보니 충분히 설득력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반면 북구 만덕동의 한 자영업자는 민주당에 부정적 시각을 드러냈다. “신공항 문제가 그동안 선거 때마다 안 나온 적이 있느냐. 이번에도 민주당이 말만 저러다가 선거 끝나면 나 몰라라 할지 모른다. 오거돈이 사퇴하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 가덕도 신공항을 추진해야 한다고 나서는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총리였는데, 그때는 안 하고 당대표 되고 저러는 걸 보면 선거용 노림수가 분명하다.”
결국 김종인 위원장은 부랴부랴 2월1일 부산에서 비상대책회의를 주재하면서 “국민의힘은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적극 지지하며, 가덕도 신공항 건설 특별법이 여야 합의하에 처리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이날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론은 반응했다. <부산일보>·이 1월31일~2월1일 리얼미터에 의뢰한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힘이 38.6%, 민주당이 25.9%로 양당 격차가 오차범위 밖인 12.7%포인트로 나타났다. 보궐선거가 가까워지면서 지지층이 결집한 데다 부산 지역의 국민의힘 우위 구도가 그만큼 강고한 셈이다.
지역 정가의 한 관계자는 “가덕도 신공항 추진에 민주당은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국민의힘은 여전히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이 문제가 부각될수록 민주당은 가덕도 신공항을 통한 부산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국민의힘은 오거돈의 성추행 사건으로 과거 책임론을 꺼낸다는 프레임이 형성될 수 있다”면서도 “부산의 전통적 정치 성향을 고려할 때, 가덕도 신공항이 이번 보선에서 중대한 변수는 될 수 있지만 결정타가 되기는 힘들지 않겠냐고 본다. 2월 말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 처리 여부가 또 하나의 고비가 될 것이다. 각 당 후보가 결정되면 본격적인 지지세 결집과 함께 여야가 끝까지 치열한 경쟁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망했다.
부산=송진영 <국제신문> 기자
*표지이야기 - 4.7 민심 르포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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