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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반체제 세력

등록 2014-04-12 16:04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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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요즘 대세는 불평등이죠.”
얼마 전 만난 한 증권업계 이코노미스트는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툭 던졌다. 적어도 나라 밖 사정만 놓고 본다면 일리 있는 얘기라고 서둘러 맞장구쳤다. 언젠가부터 해외의 저명한 경제지나 경제 관련 블로그 등에선 유독 불평등 문제를 다룬 글이 늘었다. 그간 시장경제를 뼈대로 한 주류 패러다임을 앞장서 옹호하던 장본인들이다. 주류 경제학을 옹호하는 학자들도 이런 흐름에 잇달아 합류하는 분위기다. 지금까지 ‘불평등’이란 주제가 대체로 진보·개혁 성향의 연구자나 활동가들의 일방적 외침에 그쳤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주류 경제학을 대표하는 연구자들 역시 이제는 일방적 무시나 맹목적 반박보다는, 불평등의 정확한 실태나 그것이 몰고 올 장기적 영향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분석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사실상 경제성장만을 칭송하는 목소리였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던 낯익은 슬로건이 ‘바보야, 문제는 분배야!’로 슬그머니 바뀐 꼴이다.
도대체 왜? 해답은 의외로 자명해 보인다. 현재 같은 속도로 불평등 구조가 심화된다면 사회체제의 존속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체제를 옹호하고 ‘지배’하는 집단 사이에서조차 빠르게 퍼지고 있는 탓이리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체제를 뒤흔드는 건 단지 ‘못 가진 자’들의 불만이나 집단행동이 아니라, 체제 자체의 근본적 한계 라는 뼈아픈 자성 말이다. 그간 자본주의 역사를 이끌고 온 동력은 공급과 생산 주도의 패러다임이다. 인간 생존을 위한 물질적 생산량을 얼마만큼 늘리느냐만이 최대 관심사였고, 이 과정에서 공정과 기술 혁신이 자연스레 잇따랐다.
하지만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대명제는 이제 근본적으로 도전받고 있다. 공급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수요, 생산물을 소화해낼 구매력의 결핍은 단지 일시적이고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로 굳어지고 있다. 불평등 심화, 분배구조 악화는 이런 흐름에 마치 성능 좋은 휘발유를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주요 상장사의 일정 규모 이상 등기임원 개별 보수가 처음 공개돼 화제가 됐다. 범죄를 저지른 뒤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꼬박 일당 1억원씩을 챙긴 재벌 총수도 있고, 쥐꼬리만 한 지분을 쥐었을 뿐 외유 등으로 별다른 경영활동에 나서지 않았음에도 수백억원의 연봉이나 성과급을 거머쥔 회장님도 수두룩하다. 대부분의 해당 기업에서 임원과 직원 간 연봉 격차는 수십 배를 훌쩍 넘는다. 하지만 이런 수치조차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의 극히 한 단면밖에 드러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공개 대상에서 제외된 중소기업 직원이나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 등 불안정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과 견주면, 우리 사회의 계층 간 불평등 실태는 상상을 초월하는 지경에 이른 지 오래다.
전 국제통화기금(IMF) 이코노미스트이자 인도 중앙은행 신임 총재를 맡은 저명한 경제학자 라구람 라잔이 루이지 징갈레스 미국 시카고대학 경영대학원 석좌교수와 공동으로 (Saving capitalism from the capitalists)란 책을 쓴 게 2003년이다. 일찌감치 ‘자본주의 구하기’에 나선 주류 경제학자의 눈에도, 이 시대의 진정한 ‘반체제 세력’이 누구인지는 너무도 분명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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