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돌림빵!”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돌림빵’이 뭐지? 누군가 그의 머리에 양동이를 거꾸로 씌웠다. 손잡이가 달린 허여멀건 철제 양동이. 군복과 사복 차림이 섞인 예닐곱 명이 다가와 사방을 에워쌌다. 구타가 시작됐다. 배와 가슴으로 주먹이 들어왔다. 정강이와 무릎과 허벅지에 군홧발이 찍혔다. 어깨와 등짝과 옆구리에 몽둥이가 날아왔다. 그들은 한 사람씩 돌아가며 손과 발과 도구를 이용해 고통을 선사했다.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머리를 덮은 철제 양동이는 쉬지 않고 소리를 냈다. 가해자의 눈빛을 볼 수 없었다. 때리면, 앉은 채로 그저 맞았다. 20여 분이 흘렀을까. “말해봐. 누가 찾아왔지?” 그를 끌고 온 최 계장이었다. “없어요.” “바른 대로 대라니까.” “정말 몰라요.” 한바탕 취조와 폭행이 끝나갈 즈음, 최 계장이 품에서 대검을 꺼냈다. 칼집을 나온 칼이 눈을 찌를 것만 같았다.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 입 밖에 냈다간 넌 죽는다.”
“네 형이 평양방송에 나왔어”1968년 2월20일께였다. 안용수(16)는 고문이 시작된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경북 포항시 북구 두호동 집으로 찾아온 낯선 손님. 검은 지프차. 최 계장이라 불리던, 가죽잠바를 입은 짧은 스포츠머리의 30대 남자. 잠깐 함께 가자는 요구. 입학을 앞둔 포항고등학교(대신동) 모퉁이에 위치한 ‘태백공사’ 건물. 사실은 육군보안사령부(보안사, 현 기무사) 포항지부. 어두컴컴한 취조실. 다짜고짜 던지던 질문. “정보에 따르면 누가 찾아오게 돼 있는데, 누가 왔지?”
흉흉한 뉴스가 떠돌던 때였다. 북한에서 온 ‘공비’가 청와대를 기습하려다 실패하고, 푸에블로호라는 미국 군함이 북한 해군에 납치되고,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이 도발해와(뗏 공세) 한·미·남베트남 연합군이 소탕작전을 벌인다고 했다. 연일 격렬한 반공 데모가 열렸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였다.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극점에서 끓어오르던 시절이었다. 는 매일 사회면에 방첩 표어 하나씩을 선정해 실었다. “삼천만 하나되어 분쇄하자 북괴만행.” “북괴야욕 무찔러 웃음피는 우리동네.” “악랄한 북괴적구(赤拘) 힘모아 뿌리뽑자.” 대대적인 ‘빨갱이 때려잡기’ 캠페인이었다. 그래도 이럴 줄은 몰랐다. 지방도시에서 공부밖에 모르던 어린 고등학생의 운명까지 포박할 줄은.
취조와 고문의 빌미가 된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평온한 가정이었다. 아버지 안영술(46)은 존경받는 교육자였다. 항일교육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26살이던 1948년부터 국민학교(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노릇을 했다. 전국 최연소였다. 1968년엔 포항 동부국민학교 교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나온 대구사범을 졸업했다는 학적은 찬란한 후광이었다. 곧 청와대 교육행정관으로 영입돼 서울로 이사 간다는 풍문까지 돌았다. 그를 포함한 오형제는 부모의 극진한 사랑 속에서 다들 제 몫을 했다. 큰형 안성수(27)는 공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었다. 둘째형 안학수(25)는 파월 장병이었다. 셋째형 안인수(19)는 지역의 명문 포항고 졸업반이었다. 넷째인 안용수도 포항고 시험에 붙었다. 막내 안철수(13)는 포항 동지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11개월 전 그날, 남부러울 것 없던 이 가족을 향해 파멸의 불화살이 꽂혔다.
1967년 3월27일 아침이었다. 포항중학교 3학년생 안용수는 등교하기 위해 가족의 보금자리였던 동부국민학교 교장 관사를 나왔다. 큰길로 가기 위해 국민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는 중이었다. 동네 문방구 주인아주머니가 맞은편에서 기겁한 표정으로 뛰어왔다. “용수야 큰일 났어, 큰일 났어. 학수가 평양방송에 나왔어.” 학수, 안학수는 파월 장병이라는 둘째형이었다. 1964년 9월 베트남에 파병되어, 사이공 남부 항구도시 붕따우에 있는 비둘기부대 예하 제1이동외과병원에서 전화교환병(통신병)으로 근무 중이었다. 제1이동외과병원 130명(군의관·간호사·헌병 34명, 행정지원인력 96명)은 태권도 교관 10명과 함께 최초로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병력이었다. 이 병원에선 남베트남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치료했다. 귀국 예정일은 1966년 9월16일이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지연됐다. 아버지가 애타게 둘째아들의 행방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그가 평양방송에 나왔다고? 문방구 아주머니는 빨리 집에 가서 라디오를 틀어보라고 했다.
북한 방송 근거로 탈영병·월북자 규정포항에서 잡히는 대구문화방송과 북한 대남방송은 가끔 뒤섞였다. 라디오 다이얼을 대구문화방송에 맞추다 대남방송이 잡히기 일쑤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면 다시 다이얼을 대구문화방송 주파수에 맞췄을지도 모른다. 베트남에 있다는 안학수 하사가 북한 대남방송에 월북자로 출연한 것이다. 안학수는 목이 잠기고 약간은 떨리는 음성으로 대략 이런 내용의 말을 했다. ‘미군이 버린 담배꽁초를 주워 먹으며 남한에서 비참하게 살아왔다. 아버님은 교육공무원이시다. 월남에서 북한으로 오려는 남한 군인이 많다. 나는 김일성 수령님 품으로 자진해서 월북했다.’ 성격이 활달하고 올곧고 똑똑하던 둘째형이었다. 경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 한 번 실패한 뒤 재수를 하다 우연히 모병관의 제안에 넘어가 들어간 군대였다. 1963년 9월 입대해 통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대구 5관구사령관 암호병으로 근무했다. 사령관의 추천으로 유일한 베트남 파병 통신병에 차출된 것도 가족에겐 자랑거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적으로 베트콩과 접선해 북한으로 넘어갈 이유는 없었다.
어머니 남금순(46)은 까무러쳐 쓰러졌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지내던 중앙정보부(중정, 현 국정원) 간부에게 신고했다. 그날 밤 자정 중정 요원 2명이 교장 관사로 찾아왔다. 요원들은 정중했다. 한 명이 관사 정문을 지키는 사이, 또 다른 한 명이 안학수의 북한 대남방송 출연 경위를 설명했다. 안학수가 군 헬리콥터를 타고 사이공에 의약품 수령을 위한 공무출장을 나갔다가 베트콩들에게 포로가 된 듯하다고 했다. 북베트남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북한 군사고문단원들한테 넘겨진 뒤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간 모양이라고 했다.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포로 송환 요구를 할 계획도 알려주었다. 중정 요원들은 커다란 녹음기로 “우리 학수를 속히 석방해달라”는 가족들의 메시지를 녹음했다. 가족사진도 촬영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1967년 4월, 중정 요원들은 다시 오지 않았다. 대신 보안사 요원들이 왔다. 분위기도 180도 바뀌었다. 국방부와 보안사는 북한 방송만을 근거로 안학수를 탈영자·수배자·월북자로 규정했다. 아버지는 툭하면 연행돼 조사를 받았고 사직 압력에 시달렸다. 가족 전체가 잠재적 간첩이므로 최하위 계층으로 살아야 한다는 엄포도 들었다. 1967~68년은 북한 간첩의 침투가 이전보다 10배 가까이 많아졌던 시기다. 특히 1968년 1월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의 서울 침투 이후 보안사의 압박은 살벌해졌다. 아버지가 박정희의 대구사범 후배라는 든든한 배경도 오래가지 못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헤어날 수 없는 올가미가 천천히 씌워졌다. 중학교를 막 졸업한 안용수를 데려가 고문하고 협박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죽자, 이렇게라도 복수하자보안사 포항지부에서 처음으로 이른바 ‘돌림빵’을 당하고 집에 돌아온 안용수는 입을 닫았다. 누구에게도 그곳에 다녀왔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겁이 나서 학교에도 가기 싫었다.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다. “포항고등학교 안 가렵니다. 서울의 최고 명문 경기고등학교 시험 볼 거예요. 서울에 있는 학원 보내주세요.” 안용수는 포항고 입학식날에 가지 않았다. 1968년 3월 한 달 내내 출석을 하지 않았다. 4월 초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닦달을 못 이기고 마지못해 학교에 끌려갔다. 교장은 안용수 학생이 입학시험 수석을 했다며 결석일을 모두 출석 처리해주겠다고 말했다. 고1 담임이던 국어 담당 김아무개 선생님의 눈초리는 냉담했다. 언제부턴가 ‘빨갱이 동생’이라는 말이 비수처럼 날아왔다.
한 학기에 두세 번은 학교 옆 보안사에 끌려갔다. 포항고를 다닌 지 한 달도 안 된 1968년 4월의 어느 날. 보안사 포항지부 최 계장이 수업 시간에 그를 불러냈다. 16절지(A4) 갱지를 주면서 가족동향보고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아버지·어머니·형제들은 물론 외삼촌과 고모 등 친척들의 동향까지 시시콜콜 적어야 했다. 핵심은 ‘누가 집에 왔는가’였다. 계급이 중사였던 최 계장(수사계장)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문을 했다. 적극적으로 쥐어짜서 건수를 올리면 포상금을 받는 눈치였다. 최 계장은 ‘열심히’ 일했다. 물고문을 했고, 밧줄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취조를 했다. 아무도 없는 뒷산에 데리고 올라가 꿇어앉힌 뒤 “너 하나 죽여도 아무도 모른다”는 겁박을 했다. 가장 소름 끼치는 건 권총 장난이었다. 총구를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실탄이 장전된 줄 알았다가, 머릿속이 하얘졌다.
밤이면 아버지의 관사 뒤 대나무 숲이 바람에 스치며 울었다. 서걱 서걱 서걱…. 혹시 정말로 누가 오지는 않을까. 가족들의 귀는 극도로 예민해졌다. 공포였다. 사이공에서 평양으로 점프해버린 둘째형 안학수는, 오지 않았다. 북한 공작원도 오지 않았다. 가족들은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안용수는 우울증을 앓았다.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감정 조절이 안 됐다. 이명에 시달렸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누워 있으면 천장이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귀신이 목을 조르는 환상에 시달렸다. 그 귀신은 둘째형을 납치해 북한에 넘긴 베트콩이었을까, 보안사 최 계장이었을까. 1968년 10월의 어느 날, 자살이 복수라고 생각했다. 죽자! 아무도 모르게 학교 2층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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