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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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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소련의 ‘겁쟁이 게임’


위기의 순간에 빛나는 협상의 지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소련은 얕보고 미국은 정보 실패를 거듭했지만 오해를 바로잡을 채널 가동돼
등록 2013-03-16 05:32 수정 2020-05-03 04:27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그렇게 불렀다. 미-소 양국은 핵전쟁의 문턱에서 멈추었다. 그냥 넘었다면, 대체로 두 나라에서 1억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아마겟돈, 최초의 그러나 최후의 핵전쟁을 어떻게 피할 수 있었을까? 미국의 U2정찰기가 쿠바의 소련 핵미사일 사진을 입수한 1962년 10월16일부터 양국이 극적으로 타협하는 10월28일까지의 13일은 외교사의 전설이다. 게임 이론을 비롯한 국제정치 이론의 원천이고, 위기 리더십의 상징이며, 협상학 개론의 단골 사례다. 50년이 지났지만 교훈의 샘은 마르지 않는다. 위기의 순간에 빛나는 협상의 지혜를 찾아보자.
선택의 갈림길에서 합리적 선택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라. 그것이 첫 번째 교훈이다. 존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10월16일 국가안보위원회를 소집했을 때, 선택은 두 개였다. 먼저 공격할 것인가, 아니면 쿠바의 소련 미사일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러나 케네디는 해상봉쇄라는 제3의 대안을 만들었다. 국민에게 상황을 알리고, 조처를 발표한 것은 10월22일이다. 6일간 케네디 행정부는 가능한 선택을 나열했고, 각각의 결과를 검토했으며, 가장 나쁜 선택부터 배제했다. 쿠바 공습은 핵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양보하면 그것은 정치적 자살이다. 그런 상황에서 찾은 타협안이 해상봉쇄였다. 시간을 버는 의미도 있었다.
열린 토론, 대안을 만들다
선제타격을 주장하는 군부의 강력한 요구와 거리가 있는 대안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열린 토론의 결과였다. 얼마든지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의전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위가 발언의 권위를 의미하지도 않았다. 케네디의 국가안보회의는 열린 토론으로 집단 사고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독재자의 정책 결정과 다른 것이다. 지도자의 소통 능력이 없고, 군대식 권위로 회의가 진행됐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물론 해상봉쇄는 새로운 위기의 시작을 의미했다. 핵전쟁의 공포가 미국 시민들에게 몰려왔다. 10월24일 미사일 부품을 실은 소련 선박 20척이 정선 지점 근처까지 다가왔다. TV에서는 공포의 카운트다운을 중계했다. 3마일, 2마일, 그리고 1마일. 이제 선을 넘으면 예고대로 발포할 것이고, 그러면 핵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당시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소련의 선박들에 선을 넘지 말라고 지시했다. 소련도 문턱을 넘는 행위의 결과를 잘 알고 있었다. 교착 상황에서 10월26일 흐루쇼프가 먼저 해결책을 제시했다.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두 번째 메시지에서는 “터키의 미국 미사일 기지도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10월27일을 ‘검은 토요일’이라고 부른다. 13일 중에서 하이라이트였고, 미국 전체 외교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하루였다. 국가안보회의 참석자들은 흐루쇼프의 제안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터키의 미사일 철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들의 반발을 초래할 것이며, 미국의 협상력을 약화시키고, 굴복으로 비쳐 여론의 질타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강경론이 우세한 가운데 불에 기름을 들이붓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날 쿠바 상공에서 정찰 활동을 하던 U2기가 소련의 미사일에 격추돼 조종사가 사망한 것이다.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그날 저녁을 기억한다. “회의를 마치고 백악관을 나설 때, 아름다운 가을 저녁이었다. 그러나 곧 다음주 토요일 밤에는 아마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날의 위험성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구두 약속이고 비밀이 지켜져야 한다”

1961년 6월3일 존 케네디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오스트리아 빈 주재 자국 대사관저에서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만나 회담하고 있다. 그로부터 1년4개월여 만에 벌어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두 사람은 핵전쟁 직전에 극적인 타협을 이뤄냈다. 미국 국무부 자료

1961년 6월3일 존 케네디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오스트리아 빈 주재 자국 대사관저에서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만나 회담하고 있다. 그로부터 1년4개월여 만에 벌어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두 사람은 핵전쟁 직전에 극적인 타협을 이뤄냈다. 미국 국무부 자료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그날 새벽 아바나의 소련대사관에 가서 “앞으로 24시간, 늦어도 72시간 내로 미국의 공습이 임박했다”고 흐루쇼프에게 알렸다. 그리고 미국이 침공하는 즉시 소련이 미국을 향해 핵공격을 감행해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미국 정찰기를 격추시킬 것을 명령했다. 위기를 통제하고자 했던 흐루쇼프와 생각이 달랐다. 소련의 쿠바 지역사령관인 이사 플리예프 역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명령으로 핵탄두가 무기고에서 나와 트럭에 실렸다. 미국은 당시 몰랐지만, 이미 쿠바에 98개의 전술핵무기가 배치돼 있었다. 물론 흐루쇼프는 플리예프에게 발포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주지시켰다. 그러나 모스크바와의 통신은 원활하지 않았고, 현장의 실전 심리는 부풀어올라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케네디 대통령이 비밀 채널을 가동한 것이다. 저녁 8시가 막 넘어섰을 때, 대통령의 동생이며 당시 법무장관인 로버트 케네디가 미국 주재 소련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에게 만나자고 했다. 도브리닌은 전설적인 외교관이다. 그는 1962년부터 1986년까지 24년간 소련의 미국 주재 대사로 근무했다. 그해 5월 미국에 부임하자마자 그들은 자주 만났다. 10월16일 이후에도 새벽 1시가 넘어 로버트 케네디가 소련대사관저를 몇 번 방문하기도 했다. 상대의 의도를 읽고 협상의 쟁점을 조율하려면 비밀 채널이 반드시 필요하다.

당시 세 개의 채널이 있었다. 첫째는 양국 대사관이다. 공식 채널이다. 그렇지만 상대 지도자에게 의사를 전달하려면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둘째는 지도자에게 직접 연결되는 비밀 채널이다. 바로 로버트 케네디와 도브리닌이다. 도브리닌은 당시를 회상하며 비밀 채널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언제든지 접근 가능해야 하고, 최소한 참여자들이 외교와 정치 분야를 알아야 하고, 지도자와 직접 연결돼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채널을 잘못된 정보를 주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비밀 채널을 통해 서로 외교 게임을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역정보를 흘리면 안 된다. 거짓이 밝혀지면 신뢰를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공개적인 미디어다. 흐루쇼프는 주로 모스크바 라디오를 활용했고, 케네디는 TV를 활용했다. 이 채널은 빠르고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청중이 너무 많다는 단점도 있다. 협상 상대와 여론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날 밤 로버트 케네디는 소련이 핵미사일을 쿠바에서 철수하면 쿠바 봉쇄를 풀고 불가침을 선언하겠다고 했다. 도브리닌이 물었다. 터키는? 로버트 케네디는 대통령이 4~5개월 내로 터키에서 미사일을 철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NATO 동맹국의 동의를 얻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조건을 붙였다. 구두 약속이고 비밀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체면을 세우겠다. 고도의 협상 기술이다.

이듬해 핫라인 설치해

로버트 케네디는 결정적 기술을 발휘한다. 그는 “군부는 싸우려고 환장해 있고 대통령은 더 이상 군부의 공습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아마도 앞으로 12시간, 최대 24시간 내에 모종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내일까지 답을 달라는 것이다. 당시 흐루쇼프도 군부의 압력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군부의 압력을 협상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한 것은 케네디 쪽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겁쟁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상대가 겁을 먹고 핸들을 틀게 하려면 내 핸들이 고장 나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을 상대가 알게 해야 한다. 그러면 겁쟁이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은 무식한 배짱일까? 아니다. 상대에게 출구를 마련해주며 몰아붙여야 한다. ‘벼랑 끝 전술’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부 때 국무장관을 했던 존 덜레스의 말처럼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만 밀어붙여 양보를 얻는 전술”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한편으로 밀어붙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다. 로버트 케네디의 담판이 실패했을 경우 사용할 카드다. 대통령은 당시 유엔 사무총장인 우 탄트로 하여금 쿠바의 소련 미사일과 터키의 미국 미사일을 동시에 철수하는 공식 제안을 하게 하려 했다. 소련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비밀 거래를 위해 딘 러스크 국무장관의 오랜 친구인 앤드루 코디어 당시 미 컬럼비아대 국제관계학장을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우 탄트 유엔 사무총장의 수석보좌관으로 일했다. 물론 이 카드를 쓸 필요가 없었다. 흐루쇼프가 즉각 로버트 케네디의 제안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장의 카드는 대통령과 국무장관, 그리고 코디어 세 사람만 아는 비밀로 남게 되었다.

10월28일 도브리닌이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상의 공식 전문을 로버트 케네디에게 전달했을 때, 케네디는 “마침내 아이들을 보러 갈 수 있겠네. 집에 가는 길을 거의 잃어버렸어”라고 말하며 웃었다. 도브리닌은 위기 이후 로버트 케네디의 미소를 그때 처음 보았다고 기억한다. 그렇게 위기는 끝났다. 터키의 미사일 철수 약속을 비밀로 했기 때문에 협상의 승자는 케네디가 될 수 있었다. 흐루쇼프도 체면을 세웠다. 그러나 공개할 수 없는 거래의 내용 때문에 이후 정치국 위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위기는 곧 기회다. 쿠바 미사일 위기 상황에서 미-소 양국의 실수, 오해, 그리고 그 결과인 오판이 적지 않았다. 오해는 소통의 부재로 발생한다. 상대의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하면 대체로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한다. 오판이 발생하는 것이다. 흐루쇼프는 미국의 젊은 지도자를 얕보았고, 미국 역시 정보 실패를 거듭했다. 중요한 것은 오해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안정적인 소통 수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미-소 양국은 이듬해인 1963년 핫라인을 설치했다. 크렘린과 펜타곤 사이에 소통 수단을 마련한 것이다. 핫라인은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해를 풀어 상대의 오판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7년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습했을 때, 당시 린든 존슨 대통령은 알렉세이 코시긴 총리에게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확실히 전달했다.

신뢰는 협상의 결과로 생기는 것

협상에서 중요한 것은 신뢰가 아니다. 신뢰는 협상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다. 케네디는 흐루쇼프가 쿠바에 방어용 무기만 있다고 한 말을 뒤집은 것에 분노했다.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케네디가 빛나는 것은 분노의 감정에 올라타지 않고, 신중하게 사태를 파악해 합리적으로 대안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위기 상황에서 케네디는 언제나 상대를 합리적 행위자로 간주했다. 내가 선제타격을 고려하면 상대도 똑같이 생각할 것이고, 그래서 결국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쫓겨 핵전쟁의 문턱을 넘어설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것이 지혜의 배경이었다. 무능과 오판은 비극을 부른다. 위기의 리더십은 지혜와 용기, 그리고 지도자의 책임감을 요구한다. 케네디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핵전쟁의 생존자들이 서로에게 ‘왜 이렇게 됐지?’라고 묻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한반도의 오늘, 이 말을 기억해야 한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통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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