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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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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라는 마음에 남기는 헌정시

등록 2013-03-07 18:18 수정 2020-05-03 04:27

대형 입시업체 메가스터디의 광고 문구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넌 우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질 거야/ 그럴 때마다/ 네가 계획한 공부는/ 하루하루 뒤로 밀리겠지/ 근데 어쩌지?/ 수능 날짜는 뒤로 밀리지 않아/ 벌써부터 흔들리지 마/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아.” 그러니까 경쟁에서 낙오되기 싫으면, 더 높은 점수를 받고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 더 많은 연봉을 받으려면 친구 끊고 공부하라는 친절한 훈수 되시겠다.

오케이. 그대로 돌려준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넌 선행학습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개설하는 과목들이/ 그래서 우리 부모님에게 뜯어가는 학원비가 많아질 거야/ 그럴 때마다/ 너희들의 지갑은/ 하루하루 뚱뚱해지겠지/ 근데 어쩌지?/ 우리 모두가 괴물은 아니야/ 벌써부터 사기치지 마/ 학원이 우리 인생을 대신 살아주진 않아.”

어쩌다보니 서울 강남 지역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동네 친구들보다 딱히 사교육을 더 많이 받았던 것 같지는 않다. 그냥 남들 다니는 학원들을, 남들 다 다니니까 나도 다녔다. 그래서일까. 어린 시절에는 조금 피곤했고, 많이 우울했던 것 같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어머니께 물어봤다. “그놈의 학원비 다 모았으면 집 한 채여, 이놈아!” 어머니는 땅을 치다, 가슴을 치다 하셨다. 어머니도 울고, 나도 울…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암만 학원을 다녀도 성적은 오르지도,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비싼 돈 들여 ‘메가’로 ‘스터디’해봐야 도긴개긴일 확률이 높다는 얘기다. 쟤들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친구마저 다 잃으면 어쩌려고. 어른들, 참 잔인하고 비정하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다. 거듭되는 똥볼 속에 출범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게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든 임기는 시작됐다. 경제민주화고 복지고 다 헛말이 됐다. 이건 어쩌면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21세기판 ‘박통의 시대’에 대한 오마주일까? 이렇게도 한번 해보자. “이제 임기가 시작되었으니/ 넌 속도 조절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후퇴하는 공약이/ 그리고 내버리는 약속이 많아질 거야/ 그럴 때마다/ 네 아버지의 꿈이라던 복지국가 대한민국은/ 하루하루 뒤로 밀리겠지/ 근데 어쩌지?/ 퇴임 날짜는 뒤로 밀리지 않아/ 벌써부터 흔들리지 마/ 재벌이 너의 지지율을 대신 보장하진 않아.” 오해 없으시길. 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남기는 헌정시다.

야당이라고 비켜갈까. 마지막이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너희들은 책임론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시간이 많아질 거야/ 그럴 때마다/ 네가 계획한 정권 교체는/ 하루하루 뒤로 밀리겠지/ 근데 어쩌지?/ 니들 지지율은 뒤로 밀릴 데가 없어/ 다음 대선도 포기한 거야?/ 누군가 너의 쇄신을 대신해주지 않아.” 에라이, 그만하자. 부글부글!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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