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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만 서면 왜 작아지는가

등록 2012-12-12 11:06 수정 2020-05-03 04:27

한국 정치에서 가장 유명한 ‘문전박대’ 장면은 누가 뭐래도 노무현의 것이 아닐까 싶다. 2002년 대선일 전날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가 지지를 파기하자,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정 대표의 서울 평창동 집을 급히 찾아갔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쳤다. 도착 시각은 12월19일 0시4분께였다. 대문 앞에 착잡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노 후보의 모습이 생중계됐다. “내가 무슨 말이 있겠어. 들어가서 얘기해봐야지.” 그러나 5분여 뒤 이인원 국민통합21 당무조정실장이 나와 “정 대표가 술을 많이 들어서 취침 중인 상태다. 후보께는 결례지만 그냥 돌아가시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노 후보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이 장면은 지지자들을 뭉치게 했다. 정 후보는 3년 뒤인 2005년 기자간담회에서 “그날 문을 안 열어준 것이 후회스럽다”고 털어놨다. “정치를 하면서 사람을 집으로 들이지 않아 (누가 찾아온 데) 익숙하지 않기도 했지만, (노 후보가) 왔는데 그냥 불끄고 자려 했으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 후보는 현재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이다. 뻔한 승부가 예상됐던 2007년 대선 때 ‘문전박대’가 빈번했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11월7일 아침 6시50분께 이회창 전 총재의 서울 서빙고동 자택을 찾았다. 예고 없이 갔는데, 이 전 총재는 집에 없었다. 이 후보는 아파트 경비실에서 메모지를 얻어 편지를 남겼다. 나경원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총재님을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습니다만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총재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 제가 전하고 싶은 말씀도 있습니다. (중략) 7일 새벽 이명박”이라고 적었다고 밝혔다. 이날 오후 이 전 총재는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이 전 총재 쪽의 이흥주 특보는 “안 계시는 것을 알고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양쪽이 밝힌 정황을 보면, 이 전 총재가 문전박대를 ‘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이 전 총재의 출마가 기정사실화한 상황에서 이 후보가 마지막까지 설득하려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명분을 쌓으려 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이 전 총재는 출마 이후 세 차례나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보의 서울 삼성동 자택을 찾아갔다. ‘연출한 문전박대’에 가까웠다. 그는 12월16일 “이틀 전 밤 경북 유세를 끝내고 잠시 상경해 저 혼자 박근혜 전 대표의 집을 찾아갔다. 오늘 이후로는 찾아갈 생각이 없다”고 스스로 털어놨다. 그러나 12월17일과 18일 또다시 찾아갔다. 추운 날씨에 뒷짐을 지고 집주인 만나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도됐다. 박근혜 지지자들의 표심을 자극하려는 노림수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박 후보가 이명박 후보의 선거운동을 열심히 도왔기 때문이다. 세상사는 돌고 도는 걸까. 박근혜 후보는 11월21일 이 전 총재의 자택을 찾아갔다. 5년 전 ‘세 번의 문전박대’에서 비롯된 앙금을 털어내는 맥락에서라고 한다. 이 전 총재는 11월24일 박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 노무현 후보를 제외한 문전박대 사건의 주인공들이 2012년 대선에서 ‘보수대연합’을 이루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도 12월5일 오전 안철수 전 후보의 서울 용산 자택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출발 10여 분 전에 방문 의사를 전하고, 안 전 후보가 거절했음에도 찾아간 것으로 전해졌다. 안 전 후보는 이미 집을 비웠고, 문 후보는 잠시 아파트 로비에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극비로 추진된 방문은 이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 문 후보 목격 사실을 페이스북에 올려 알려졌다. 안 전 후보 쪽이 민주당의 언론 플레이라고 반발해 한때 양쪽에 긴장이 고조됐다. 그러나 ‘삼고초려’와 ‘문전박대’ 사이 어디쯤에서 양쪽의 물밑 논의가 성사됐다. 두 사람은 하루 뒤인 12월6일 오후 단독 회동을 했고 선거 협력에 합의했다. 단일화가 완성됐다. 이날 오전 ‘정권교체와 새정치를 위한 국민연대’가 출범했다. 민주당은 ‘미래대연합’이라고 이름 붙였다. 보수와 진보의 ‘큰 싸움’이 이제 시작됐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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