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두고 ‘여성 대통령 시기상조론’을 꺼냈다가 혼쭐이 났다. “분단 현실을 체험하지 않고 국방을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리더십을 갖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를 전해들은 박근혜 후보는 “21세기에도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나요?”라고 쏘아붙였다. 친박 조원진 의원은 “아직 정신줄을 놓을 나이가 아닌데”라고 했다. 여성 대통령 자체를 문제 삼았다가는 이런 꼴을 당하는 시대다.
박 후보가 지난 8월20일 대통령 후보로 뽑히자마자 ‘여왕 칭송’이 시작됐다. 황우여 대표는 박 후보를 대영제국 시절의 빅토리아 여왕과 엘리자베스 1세에 빗댔다. 박 후보의 ‘커피 서빙’으로 화제가 됐던 8월31일 새누리당 연찬회에서는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게 여성 최초 임금인 선덕여왕”이라는 건배사도 등장했다. 여기까지는 ‘아부’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선거전이 본격화하자 새누리당의 여성 대통령론은 ‘진화’한다. “여성 대통령은 역사적인 일이다. 여성들은 무조건 박근혜 후보를 찍어 대통령으로 선출할 역사적 사명이 있다”는 황우여 대표의 ‘역사적 사명론’(10월4일 중앙여성위 대선 필승 결의대회)은 ‘돌아온 친박’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을 통해 ‘정치 쇄신론’으로 나아갔다. “그동안 여성 국무총리, 여성 당대표, 여성 대법관은 있었지만, 여성 대통령은 없었다. 여성 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우리 정치의 최고의 쇄신이고, 남성 중심의 기존 체제에 새로운 변화와 바람을 몰고 올 사회적 혁명이다.” 박 후보의 생각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박 후보는 지난 10월18일 세계여성경제포럼 축사에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면 건국 이후 가장 큰 변화이자 쇄신”이라고 말했다.
여성 대통령이 정치 쇄신인가. ‘미스터 쓴소리’란 별명을 갖고 있는 조순형 전 의원의 답을 들어보자. 10월9일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 심포지엄 뒤 열린 오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새누리당에 ‘남자 의원’은 박근혜 후보 단 한 명뿐이다.” 황우여 대표가 “여자 몸으로 정말 대단하시다”며 박 후보를 추어올리자 나온 ‘촌철살인’이었다. 이 소식을 트위터로 전한 정옥임 의원은 “모두 웃었으나, 제겐 쓴소리로 들렸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좌중이 썰렁해졌고, 조 전 의원은 “아니 뭐, 영국에서 대처도 남자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덧붙였다. 조 전 의원은 심포지엄 초청 연설에서 새누리당이 해결해야 할 정치 쇄신의 첫째 과제로 “1인 지배 체제로 인한 사당화 타파”를 꼽았다. “박 후보의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과거사 인식이 문제”라고도 했다.
2002년 초 여성계의 ‘박근혜 지지론’ 논란이 있었다. “박근혜를 사유하자”는 영화잡지 편집장인 최보은씨의 주장이 발단이 됐다. 여성 국회의원이 스무 명도 안 되던 시절이었다. 여성 정치의 척박함을 한탄하며 나온 주장이었지만, 진보 진영은 물론 여성계에서도 포화가 쏟아졌다. 여성의 정치 참여와 민주주의 실현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인데, ‘박정희의 딸’에게 민주주의가 들어설 틈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2012년 새누리당의 1인 사당화와 과거사 논란에서 드러난 박 후보의 태도와 인식은 “맞다. 틈이 없다”고 증명하는 듯하다. 박 후보의 불통과 권위주의는 소통·포용·공감 등을 핵심으로 하는 ‘여성 리더십’과는 정반대다. ‘여성 대통령’에 별반 호응이 없는 이유다. 여성학자 정희진씨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 숫자가 2라는 사실 외에는 여성과 가장 거리가 먼 여성이다. 그녀는 여성도 국민도 대변하지 않는다. 그녀의 몸은 ‘아버지 박정희’를 매개한다”고 말한다.
여성이 대통령이 되는 것 자체가 여성의 지위 향상에 큰 영향을 끼치리라는 관점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유일한 남성 의원’이라는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그렇게 볼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이다. ‘진생쿠키’ 발언으로 공분을 자아낸 김성주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은 박 후보를 “그레이스 언니”라고 부른단다. 언니, 언니 맞아요?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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