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처작주(隨處作主).
‘어디를 가든 주인이 되어라’는 뜻으로,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20여 년 전 신흥사 오현 스님에게서 받은 뒤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문구다. 중국 당나라의 선승인 임제 선사가 남긴 ‘수처작주 입처개진’에서 나온 말로 ‘어디에서든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 서는 곳은 모두 참된 곳이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다.
손 고문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을 탈당한 직후인 2007년 3월22일 서울 인사동의 한 화랑에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도 손 고문은 수처작주를 거론하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것이 진정한 주인의식”이라고 했다.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다.
따지고 보면 2007년의 손학규는 2012년의 안철수와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당시 손 고문은 자신에게 탈당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진 김지하 시인을 만난자리에서 “무능한 진보와 수구적 보수를 제치고 국민의 실질적인 삶을 마주하겠다. 그게 바로 중도 아니냐”고 했다. 김 시인은 “중도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임시정부의 백범과 여운형도 남북 양쪽의 극단주의에 박살 나지 않았느냐”며 애정 어린 격려를 건넸다. 최근 김 시인은 ‘여성 대통령론’를 옹호하며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공개 지지해 시인을 아는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과문한 탓인지 김지하의 생명 사상과 박 후보 사이에, ‘타는 목마름으로’와 새누리당의 정권 재창출 사이에 어떤 거대한 맥락이 숨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탈당 이후 손 고문의 행보는 잘 알려진 대로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손 고문의 사무실에는 늘 수처작주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그건 정치인들이 흔히 가질 법한 사사로운 권력욕의 점잖은 표현일까.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여야 대선 후보들의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11월27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문재인 후보 유세 현장을 지켜보며 수처작주를 다시 떠올렸다. 이날 손 고문은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의 상대였던 문 후보, 김두관 전 경남지사, 정세균 상임고문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연설은 손 고문만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경선 과정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구호가 괜찮으니까, 문재인 후보가 ‘내가 후보가 되면 나한테 좀 빌려줄 수 있느냐’고 했어요. 그때 내가 좀 인색했어요. ‘어, 안 돼요. 내가 후보가 될 텐데’라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문재인 후보가 우리 자랑스러운 민주통합당의, 아니 민주세력의 단일후보가 되었습니다. 저녁이 있는 삶을 문 후보에게 빌려드리는 게 아니라, 몽땅 드리고자 합니다.” 유세장에 모여든 지지자들 사이에선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손 고문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제목의 노래도 불렀다. 평소 친분이 두터운 박치음 순천대 교수가 지난 경선 과정에서 곡과 가사를 썼다고 한다.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창립 멤버인 박 교수는 1980년대 널리 불렸던 등을 만든 ‘민중가요 1세대’다. 마이크를 쥔 손 고문은 “제가 해볼 테니까 아는 사람은 따라해보세요”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비누 향기 날리며/식탁에 둘러앉아/ 웃음꽃을 피운다/ 떳떳하게 일하고/ 당당하게 누리자/ 모두 함께 일하고/ 모두 함께 나누자/ 저~녁~이 있는 삶.” 손 고문으로선 안타깝겠지만 널리 알려지지 못한 노래다. 따라 부르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손 고문은 정말로 열심히, 팔뚝질까지 해가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청중도 박수를 치며 그 흥겨운 에너지를 나눠가졌다. 날선 언어들이 난무하는 대선 선거판을 잠시 동안이나마 축제의 장으로 만든 건 다름 아닌 그의 수처작주가 아니었을까. 최근 손 고문은 문재인 후보, 안철수 전 후보와 따로 만나는 등 양쪽의 가교 역할도 하고 있다.
문득 박근혜 후보 주변에는 손학규 같은 사람이 있나, 궁금해졌다. 없는 것 같다. 경선에서 박 후보와 경쟁했던 인사들이 유세장에서 “박근혜가 샤방샤방, 아주 그냥 죽여~줘요”를 부른다고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겠다는 얘기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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