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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 약딸기’ 먹은 챔프의 박근혜 지지 선언

등록 2012-11-29 18:28 수정 2020-05-03 04:27
유제두 선수는 현재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위치한 ‘태양체육관’을 운영한다. 유신정권의 피해자인데도 가해자의 딸 을 지지한다. 한겨레 자료

유제두 선수는 현재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위치한 ‘태양체육관’을 운영한다. 유신정권의 피해자인데도 가해자의 딸 을 지지한다. 한겨레 자료

1975년 6월7일 저녁 두 남자가 링에 섰다. 유제두 선수와 와지마 고이치 둘 다 인파이터였고 한 방이 있는 슬러거였다. 일본 규슈 고쿠라 체육관의 수만 개눈이 링에 쏠렸다. 챔피언 와지마는 강했다. ‘복싱신닷컴’(boxingscene)이 2009년에 발표한 역대 최고의 주니어 미들급 선수 20명 안에 11위로 꼽혔다.

주니어 미들급부터는 동양인의 영역이 아니다. 고기와 치즈를 먹는 남자들의 싸움터다. 66.7~70kg이지만 감량을 고려하면 주니어 미들급 선수들의 평소체중은 75~80kg에 달한다. 오스카 델라 호야, 슈거레이 레너드, 펠릭스 트리니다드. 이 체급의 별들만 일별해도 두 동양인이 탈아시아급이었음을 쉬 알 수있다. 7회 지친 와지마가 무의미한 왼손 잽을 던졌다. 던진 왼손을 회수하는 속도가 느렸다. 왼쪽 안면이 열렸다. 유제두 선수는 상체를 흔드는 스웨이로 잽을 피하자마자 활짝 열린 와지마의 왼쪽 턱을 오른손 훅으로 가격했다. 와지마는 일어섰지만 두 번 더 다운됐다. 가난한 나라의 도전자는 챔피언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며칠 뒤 청와대로 불렀다. 하사금을 줬다. 그 옆에 영부인 역할을 하던, 지금의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서 있었다.

1976년 2월17일 재대결이 벌어졌다. 유제두 선수의 움직임은 확실히 1차전과 달랐다. 주먹을 자주 내지 못했다. 화장실이 급한 것처럼, 안면보다 복부 쪽에 가드가 내려와 있다. 두드려맞다가 결국 15회에 패했다. 그러다 복싱 인기가 급격히 몰락하며 유제두 선수도 잊혀졌다. 그는 지금 태양체육관 관장이다.

유제두 선수는 2006년 9월 느닷없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참여정부 과거사위원회가 독재정권 시절 사건을 파헤치던 시기였다. 유씨는 “당시 중정(중앙정보부) 요원이던 목포 출신 후배 신아무개씨가 1982년께 찾아와 ‘(2차전) 경기 전에 먹은 딸기 속에 중정 요원이 약을 넣었다고 하던데요’라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유씨는 “김대중 선생과 친분이 있는 나를 견제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과잉 충성하는 차원에서 약물중독 공작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며 “과거사위에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내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씨는 호남 출신이다. 1971년 주니어 미들급 동양챔피언 당시 선배의 권유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명절 때마다 인사를 갔다. 유제두 선수는 “동향으로 김 선생과 친한 모습이 (중정에는) 썩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중정 부장은 신직수였다. 그러나 유제두 선수가 실제로 과거사위에 진정을 넣은 것 같지는 않다.

그랬던 그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 지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유신의 피해자인데 박 후보를 지지한 것이다. 그에게 전화했으나 유제두 선수는 에 더 이상 ‘중정 약딸기 사건’을 언급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인터뷰도 고사했다. “그 사건이라면 이제 잊어버릴랍니다. 그 사건이라면 인터뷰 안 합니다.” ‘왜 박 후보를 지지하느냐’고 물었다. “챔피언이 된 뒤에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러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때 박근혜 후보가 영부인 역할을 하고 있었어요. 그게 인연입니다.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정에서 안 좋은 일을 당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연신 “그 사건은 이제 잊고 싶습니다”라고만 말했다. 그는 11월28일 박근혜 후보 지지 선언에 동참할 계획이다.

홍성담 화백의 그림으로 논란이 인다. 진보 진영 안에서도 비판이 나온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와 정책을 보자’는 말이 자주 회자된다. 정치 전략상 옳은 말이다. 그러나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과거에서 벗어나라고 강요하는 것은 잔인하다. 모질게 잊지 않는게 아니라 잊고 싶은데 잊히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게다. ‘이제 잊자’는 목소리 뒤에 숨어, 딸기에 약을 넣었을 중정 요원은 어디선가 웃고 있을 게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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