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7월, 출근길에 노무현 후보를 만난 적이 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주택은행(지금은 스타벅스로 바뀌었다) 앞에서다. 명함을 나눠주고 있었다. 악수를 하는데 (실제와 달리) 몸집이 크다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한 뒤 나가는 선거마다 떨어진 그는 98년 7월21일 종로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당선돼 개혁의 중추로 다시 주목받게 된다. 이 선거는 ‘하필’ 이명박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형을 앞두고 사퇴해 치러진 것이었다.
종로는 ‘정치 1번지’로 불린다. 청와대가 자리한데다, 윤보선에 이어 이명박·노무현 등 3명의 대통령을 배출하며 명성이 높아졌다. 선거 때마다 거물급 인사들이 종로에 출사표를 낸다. 그러나 종로가 정치의 중심이라는 건 총선 때 얘기다.
대선에서는 늘 여의도가 주 무대다. 주요 정당들의 당사가 여의도에 있고, 대선 캠프도 당연히 여의도에 마련된다. “기존 정치권과 달라요”를 외친 제3후보들도 마찬가지였다. 2002년 정몽준 후보는 서울 서소문에 임시 캠프를 만들었다가 국민통합21을 창당하며 여의도로 옮겼다. 2007년 문국현 후보도 서울 여의도 세실빌딩에 대선 캠프를 꾸리고 창조한국당을 창당했다. 올해 대선은 사뭇 다르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는 대선 캠프를 종로에 차렸다. 여의도가 아닌 곳을 일부러 골랐다고 한다.
지난 10월2일 서울 종로구 공평동 공평빌딩에 있는 안철수 캠프를 찾았다. 건물 외벽에 “진심의 정치. 미래는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안철수”라고 쓰인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1층 현관 안내문에는 “여기는 국민이 선택하는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는 곳. 안철수의 진심 캠프”이라고 적혀 있다. 5층 엘리베이터 앞에는 “저에게 주어진 시대의 숙제를 감당하겠습니다. 진심의 정치 안철수”라고, 기자실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건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을 걸어놨다. 모두 파란색으로 꾸몄다.
5층에는 민원·상담실과 기자실이, 6층에는 출입이 통제된 실무진 사무실이 있다. 모두 400평이다. ‘소통과 개방성’을 콘셉트로 한 민원·상담실은 공간 분리를 투명한 유리벽으로 해놓아 확 트인 느낌을 준다. 지난해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박원순 희망캠프와 비슷하다. 4월 총선 때 찾았던 부산 사상구의 문재인 후보 캠프도 꼭 이랬다. 공간의 형식만으로는 새로운 게 없다는 얘기다. 실무진은 정책팀, 정책기획팀, 메시지팀, 대외협력팀, 일정기획팀, 홍보팀, 상황실, 비서팀, 민원팀, 법률지원팀 등 10개 팀의 네트워크 체제다. 수평적·융합적 소통을 강조했다고 설명한다.
추석에 이은 징검다리 연휴에 낀 평일이라 그런지 다소 한산했다. 이곳에서 만난 이들은 ‘변화’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자원봉사자 장봉근(27)씨는 “안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세상이 변화하는 걸 보면 정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안 후보가 상식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그런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80대 백발의 노부부는 경기도 용인에서 2시간 걸려 찾아왔다고 했다. “안 후보는 때가 안 묻었다. 혼자 뛰는 게 딱해서 도우러 왔다. 국민들이 변하고 쇄신해야 한다”고 노인은 목소리를 높였다. 캠프의 한 관계자는 “민주당은 변화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기득권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보개혁 진영의 변화 동력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 안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야 변화를 이끌어낼 추진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안 후보가 내세운 ‘새로운 정치’의 밑그림은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본인의 존재 자체를 정치 쇄신의 상징, ‘이미 와 있는 (변화된) 미래’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안 후보는 10월7일 이곳에서 첫 정책비전 발표회를 여는데, 캠프에서는 정치 쇄신 프로그램을 내놓을지 민생경제에 초점을 맞출지 고심했다고 한다. 종로는 ‘새로운 정치 1번지’가 될 수 있을까. ‘새로운 변화’가 무엇인지, 유권자들이 종로를 지켜보고 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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