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고, 계절은 바뀐다. 지난 10월14일 서울 용산구 효창운동장에 사람들이 많았다. ‘30회 대통령기 이북도민 체육대회’가 열렸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 모두 이곳을 방문했다. 가운데 본부석을 중심으로 오른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평안도민회-황해도민회-미수복 경기도민회-함경도민회-북한이탈자주민대표단’ 순서로 회원들이 자리했다.
3명 가운데 가장 먼저 도착한 문 후보는 오전 11시50분 평안도민회 관람석부터 인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우물거리며 도시락을 먹는 노인들의 얼굴이 벌겋던 게 쨍한 가을볕 때문인지, 반주로 마시던 소주 때문인지는 명확지 않다. 10분쯤 지나 욕설이 나오기 시작한 건 명확하다. 40대부터 70대까지 평안도민 회원들은 반감을 감추지 않았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넉넉한 몸집의 여성이 문 후보를 보자 갑자기 마이크를 잡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악수하지 마! 피켓 들어!” 주위에 있던 회원들이 미리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종이를 일제히 들었다. ‘햇볕정책 포기하라’는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남성 노인들로부터 막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관람석 돌기를 포기하고 문 후보가 트랙으로 내려와 미수복 강원도민회와 황해도민회 앞을 지나는 순간 물병이 날아왔다. 여러 차례 보도된 ‘물병 사건’이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일군의 사람들이 ‘6·15 망령 사라져라’ 등이 쓰인 피켓을 들고 문 후보를 따라다녔다. 피켓을 들고 있던 김병호(51) 평북도민회 중앙청년회 감사는 “퍼주기와 햇볕정책은 안 된다. 또 최근 보도를 보면 북방한계선(NLL)을 무시하는 발언이 회담에서 나왔다는 것도 문제다.”
‘대통령 후보에게 좀 심하다’는 생각과 ‘이 정도면 무난한데?’라는 생각이 오락가락할 때쯤, 문 후보는 미수복 경기도민회와 함경도민회 앞을 지나쳤다. 함경도민회 앞에서도 한 차례 물병이 날아오긴했다. 그러나 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욕설이 잦아들었다. 세대 차이도 느껴졌다. 40대 이하로 보이는 회원들은 문 후보를 딱히 환영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노인들처럼 쌍욕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쿨하게, 도시락을 먹었다. 아내·아들과 함께 간이 돗자리에서 도시락을 먹던 40대 남성은 문 후보와 기념사진을 찍자며 아들을 일으켜세웠다. 50대 중반의 선글라스를 낀 여성도 문 후보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북한이탈주민(탈북자) 대표단 앞에서는 환호성이 더 커졌다. 탈북자 회원 다수와 일부 함경도민 회원은 야구 응원에 쓰는 노란색 막대풍선을 흔들며 “문재인!”을 연호했다. 문 후보 아버지는 함경남도 함흥 출신 실향민이다. ‘함경도민회야 그렇다 치고, 탈북자들은 뭐지?’라 생각하며 갸웃거리던 내게, 김병호 감사가 슬쩍 다가와 묻지도 않았는데 말을 걸었다. “잘못된 인식이 있어서 저러는 거예요. (남한에) 내려오기 전에 세뇌교육을 받아서.” “잘못된 인식이라는 게 무슨 말씀이죠?”라고 되묻자 김 감사는 귀에 입을 대고 사뭇 진지하게 설명해줬다. “그러니까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퍼주기를 해서 그 인상 때문에 저러는 거예요.” 말인즉슨, 햇볕정책으로 개성공단 등 남북경제협력의 기억을 가진 탈북자들이 ‘세뇌교육’ 탓에 문 후보에게 환호성을 보낸다는 게다.
시간이 흐르면 계절도 바뀌며, 노인들은 늙고, 새 세대가 태어난다. 내전의 기억을 가진 실향민들은 이념의 리트머스시험지다. 어떤 색이든 자기와 다르면 무조건 빨간색으로 인식하는 시험지다. 아주 희미하지만, 그날 이북도민회 리트머스시험지는, 조금씩 색 감응이 달랐다. 10월4일 그날, 물병도 있었고, 노란 풍선도 있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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