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울 것이다. 문재인 후보의 이야기다. 그는 패장이다. 대선 투표일인 12월19일 아침 7시 문 후보는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사상구 엄궁동에서 투표를 마친 뒤 “진인사했으니 대천명해야죠”라고 말했다. 서울로 이동한 문 후보는 서울 삼성동 코엑스몰에서 열린 투표 독려 행사에서 이런 말도 남겼다. “많은 국민들이 현실에 분노한다. 많은 국민들이 세상이 바뀌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분노하고 간절히 바라도 투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투표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투표가 나의 삶을 좌우한다. 투표가 민생이다. 투표가 밥이다.”
투표와 개표 방송은 서울 종로구 구기동의 자택에서 부인 김정숙씨와 함께 봤다고 한다. 예상을 뛰어넘은 높은 투표율이 반대표의 결집이었음을 확인한 그날 저녁 문 후보는 당사를 찾아 “역사에 죄를 지은 것 같아 송구하다”며 “패배를 인정한다”고 했다. “모든 것은 저의 부족함 때문이다. 저의 실패이지 새 정치를 바라는 모든 분들의 실패가 아니다”라는 말도 했다. 역대 대선에서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은 대선 후보였지만 그 언행에서 미련 섞인 군더더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후 며칠 동안의 행보도 그렇다. “제가 새로운 정치, 새로운 시대를 직접 이끌어보겠다고 생각했던 꿈은 끝이 났다”며 “다음에는 더 좋은 후보와 함께 세 번째 민주정부를 만들어내는 일을 반드시 성취하길 바란다”고 했다. 차기 대선에는 도전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힌 발언이다.
다음날 열린 캠프 해단식에선 ‘친노의 한계’를 직접 언급했다. 그는 “후보의 부족함 외에 친노의 한계일수도 있고, 민주당의 한계일 수도 있고, 진영의 논리에 갇혀 중간층의 지지를 좀더 받아내고 확장해나가지 못한 부족함일 수도 있고, 바닥 조직에서 부족하고 빈틈이 많아 공중전에 의존하는 선거 역량의 한계일 수도 있다”고 짚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정치에 투신한 이후 ‘노무현의 비서실장’ ‘친노의 2인자’라는 꼬리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문 후보 자신이 패배의 원인 중 하나로 ‘친노의 한계’를 들었다. 적어도 문재인은 자신을 객관화해서 성찰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그런 사람, 적어도 정치권에선 별로 없다.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들은 학점, 토익 성적, 어학연수 경력 등등을 묶어 ‘스펙’이라고 부른다. 문 후보의 스펙을 따져보자. 가난한 피란민의 아들로 부산이 연고지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강제 징집돼 군 복무를 마쳤다. 인권변호사 출신에 한 정권의 중심에서 국정 운영을 경험했다. 주변도 깨끗하다. 반대 진영에서도 문재인이라는 개인의 됨됨이를 문제 삼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한사코 정치를 멀리했지만 정권 교체의 열망 속에서 결국 호출됐다. 거리에서 확성기를 통해 사자후를 토하는 달변가는 아니지만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말할 줄 아는, 절제된 언어의 품격을 갖춘 사람이다. 그리고 역대 어떤 대통령보다 많은 1469만2632표를 얻었다. 이런 대통령 후보, 야당은 다시 가져볼 수 있을까.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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