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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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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모여 외쳐보자, 강기훈은 무죄라고

등록 2012-10-17 15:38 수정 2020-05-03 04:27
자난 9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서울시립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강기훈의 쾌유와 진실을 위한 후원콘서트‘에서 관객들이 다같이 일어나 어깨동무를 하며 안치환의 노래 ‘광야에서‘를 부르고 있다. 오마이뉴스 제공

자난 9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서울시립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강기훈의 쾌유와 진실을 위한 후원콘서트‘에서 관객들이 다같이 일어나 어깨동무를 하며 안치환의 노래 ‘광야에서‘를 부르고 있다. 오마이뉴스 제공

강기훈 사건의 재심리가 방치되고 있다. 그 피해자인 강기훈씨는 간암 수술을 받고 무거운 병마와 싸우고 있다. 하지만 명백히 잘못된 증거로 명백히 잘못된 판결을 번번이 내렸던 대한민국 법조계는 벌써 3년째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으며, 진실과 양심이 21년째 어둠 속에서 흐느끼며 무너져가는 사이에 이 사건을 만들어낸 법관들은 승승장구해 기성 권력의 일원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무죄인 강기훈은 죽어가고 있다. 더 이상 늦추지 말라. 지금 당장 사건을 재심리하라.

독재는 사람을 냉소자로 만든다

권력과 시스템에 억울한 피해를 당한 이가 한둘이 아닌데 어째서 경제 칼럼 지면에서까지 이런 격앙된 목소리를 외쳐대는가라고 의아해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은 결코 강기훈 개인의 문제도 아니요, 권력에 의한 인권 파괴라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21년간 우리가 살아온 대한민국이 어떠한 권력 체제 아래로 굴러왔는지를 소름 끼치게 밝혀내는 상징이라는 것이 이 사건의 진정한 성격이다. 그 권력 체제는 한마디로 ‘어둠의 거버넌스’라고 할 만한 것이다.

중국의 문호 루쉰은 “독재는 사람을 냉소자로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랬다. 몇십 년에 걸친 독재 체제에 길들어버린 1980년대의 한국인들은 문제가 되는 시국사건이 터질 때마다 정부가 내놓는 모든 이야기에 코웃음을 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독재 권력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힘은 거의 전적으로 폭력에 기초한 것이었다. 정보기관의 고문으로 희생된 한 젊은이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실로 엽기적인 해명을 내놓는다. 이에 의문을 품는 이들은 언론인이건 종교인이건 학생이건 정치인이건 모조리 잡아다가 또 주리를 튼다. 사회 전체는 싸늘한 침묵으로 뒤덮인다. 그 침묵을 이불로 둘러쓴 사람들은, 하지만 꼭꼭 숨은 채로 냉소를 날린다. 하지만 냉소도 계속 쌓이다 보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폭발한다. 그 결과 몇십 년의 군부독재도 무너졌고, 1980년대 말 이후로 한국 사회는 민주화라는 새로운 길로 나아갔다.

1991년 5월을 기억하는 이들은 당시 정권의 폭력에 항의해 줄줄이 이어지던 분신과 죽음들, 그에 호응해 정권 타도를 외치며 도심을 꽉 메웠던 몇십만 명의 시위 군중, 정권이 처해 있던 절체절명의 위기를 기억할 것이다. 몇 년 전만 같아도 정권은 이들을 폭도로 또 불온 좌경 세력으로 매도해 힘으로 짓밟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궁지에 몰린 지배 권력을 살려낸 건 1990년대 당시의 세계적 추세에 맞는 일종의 ‘거버넌스’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악마들

거버넌스는 일의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통치 행위를 정부가 독점하는 대신 여러 민간 단위의 참여를 통해 함께 수행한다”는 뜻으로도 쓰이며 그 점에서 ‘협치’(協治)라고도 옮겨진다. 1991년 5월에도 그랬다. 먼저 거의 잊혀져가던 시인 김지하가 난데없이 툭 튀어나와 당시 이어지던 분신과 죽음들이 ‘어둠의 세력’에 의해 일괄적으로 조직된 것 아니냐는 혐의를 씌운다. 다른 이도 아니고 한때 정권에 목숨을 걸고 맞섰던 저항시인이자 운동권과도 긴밀한 관계에 있을 성싶은 재야 인사의 말이 아닌가. 이를 빌려 보수신문은 일제히 이를 거의 하나의 틀림없는 사실인 양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한다. 목숨을 버린 이들은 졸지에 악마들의 사악한 흑마술에 사용된 제웅 인형이 되고, 거리의 군중은 그 마술에 들러씌운 좀비들로 매도된다. 그러자 이번엔 검찰이 나서서 반드시 ‘배후’를 밝혀내고 말겠다고 다짐한다. 여기에 참으로 운 없는 김기설·강기훈씨 두 사람이 걸려든다. 검찰은 분신한 김기설씨 유서의 필적이 강기훈씨의 필적이라고 우겨댄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여기에 자신들의 필적 감정을 과학적 증거랍시고 들이대며 이를 뒷받침했다. 그놈의 필적 감정, 오로지 그 알량한 필적 감정 하나만을 증거로 하여 법원은 강기훈씨에게 김기설의 죽음을 사주한 악마라는 실로 엄청난 죄를 씌워 감옥에 집어넣는다. 그 뒤 인기 만화가 허영만은 투쟁을 위해 조직원을 분신자살로 내모는 사악한 운동권 세력을 그린 를 쓰며, 이 책은 병영과 여타 국가기관 및 각급 학교에서 대량으로 유통된다.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 당시 스물 몇 살의 청년이던 나 또한 자고 나면 새롭게 들려오는 안타까운 죽음의 소식 때문에 충격의 강도가 매일매일 커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미에 터진 강기훈씨 사건은 그때까지 받았던 충격을 모두 합친 것을 훌쩍 뛰어넘는 큰 충격을 던졌다. 어떻게 이토록 잔인하고 엽기적인 악마적 상상이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을까.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끼리 정치적 목적에서 서로에게 분신자살을 강요한다고? 정말로 그들의 말이 옳다면 운동권은 실로 어둠의 세력이요 마땅히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악마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어둠의 세력은 바로 그런 터무니없는 혐의를 씌운 자들이다. 그리고 경악 이상으로 공포스러웠다. 이제부터 정부 대신 이렇게 공명심에 눈먼 지식인, 자발적 보수언론, 권력에 줄을 선 법조인, 얘깃거리에 굶주린 작가 등이 전면으로 나서는 것인가. 이들이 힘을 합쳐 상상력을 짜내고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에 근거해 법의 폭력을 휘둘러댄다면 만들어내지 못할 이야기가 무엇이며 손대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독재정권은 민중의 저항으로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어둠의 거버넌스는 도대체 무엇으로 어떻게 맞서야 하는 것일까.

그 뒤 21년 동안 어둠의 거버넌스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독재 시절에는 침묵의 이불 아래에서 냉소라도 날릴 수 있었지만 이 어둠의 거버넌스는 정당한 반론조차 물량과 힘으로 짓눌러 주변의 목소리로 내리 깔아버린다. 그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짓눌린 채 우리는 지난 21년을 살아왔다. 그리하여 평범한 직장인 한 사람은 민간인 사찰의 표적이 되어 삶을 송두리째 파괴당했고, 전직 총리 한 사람은 몇 년째 표적 수사를 당하고 있으며, 전직 대통령 한 사람은 낭떠러지에 몸을 던져야 했다.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 갈수록 심화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은 1980년대 이전과 똑같이 무지하고 탐욕스럽고 위험한 ‘좌파들’의 선동으로 치부돼왔다.

밝고 따뜻한 나라로 가는 길

몇 년 전 국가기관의 공식적 조사에 의해 강기훈씨 사건의 ‘증거’라는 게 터무니없는 것임이 명백히 밝혀졌고, 사건은 재심리에 부치기로 했다. 이제 그 긴 세월 동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심적 고통으로 살아온 강기훈씨에게 눈곱만큼이나 사회가 무언가를 돌려줄 기회가 왔다. 그리고 그를 시작으로 하여 이 어둠의 거버넌스를 일소하는 작업을 시작할 기회가 왔다. 엊그제 강기훈씨 사건의 재심리를 요구하는 콘서트가 있었고 공연장은 꽉 들어찬 시민들로 발 들일 틈이 없었다고 한다. 먼저 우리 모두 인터넷 검색으로 이 21년 전의 사건에 대해 공부하자. 그리고 일주일에 한 사람씩이라도 모르는 이들에게 이 일을 알리자. 병마와 싸우는 강기훈씨 앞의 계좌번호로 ‘입금 연대’도 잊지 말자. 조만간 이런 콘서트가 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때 함께 모여 외쳐보자. 강기훈은 무죄라고. 모든 어둠에는 끝이 있는 법. 희미하게나마 밝음이 다가오고 있다. 올해가 지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밝고 따뜻한 나라로 가는 길이 시작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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