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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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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줏단지부터 먼저 깨버려라

‘창조적 파괴’ 무수히 반복되는 자본주의 영리 활동의 세계
통합진보당 사태는 무능한 진보에 ‘창조적 파괴’가 강제된 것
등록 2013-09-12 15:07 수정 2020-05-03 04:27

‘이석기 및 통합진보당 사건’을 보면서 가장 심한 충격과 허탈감에 휩싸인 이들 중 하나는 스스로를 진보세력에 속한다고 여겨온 이들일 것이다. 1980년대 이후 그렇게 긴 세월이 지났고 또 그토록 많은 일을 겪어왔건만 한국의 진보는 어찌 이리도 변한 것이 없고 오히려 이 꼴로 망가져버렸단 말인가. 그토록 입이 닳도록 누구나 이야기해왔던 ‘창조적 파괴’니 ‘혁신’이니 하는 소리는 아무 소용이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떨까. 시대착오적인 종북 및 여타 이념에 찌든 세력과 결별하고 21세기의 현실을 효과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세력으로 거듭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주사파’와 현실적 절연 힘들어

나는 ‘창조적 파괴’라는 낯익은 어구에 잠깐 주의를 기울이는 게 중요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요즘 이 말은 ‘새로운 기술이나 혁신을 맞아들이게 되면 기존에 있던 것들이 사라지고 파괴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정도의 말로 통속화돼 있다. 스마트폰 나왔는데 누가 블랙베리폰에 연연한단 말인가. 블랙베리사가 헐값이 되어 매각되는 것도 당연한 이치이며 또 당사자들이 감내해야 할 어쩔 수 없는 고통이다. 세상은 아랑곳 않고서 스마트폰의 장밋빛 미래로 나아간다…. 이 말은 본래 조지프 슘페터가 만든 개념이 아니다. 헤르더가 힌두교의 시바·브라마 신화를 차용한 이후 괴테와 니체와 독일 역사학파를 이어온 오래된 개념이며, 특히 이를 자본주의의 발전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한 이는 베르너 좀바르트였다. 좀바르트의 아이디어를 사실상 도용한 슘페터는 이 말을 상당히 말랑말랑하고 진부한 내용으로 만들어버렸지만, 좀바르트와 니체의 저작에 나타난 ‘창조적 파괴’ 개념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중에서 지금 한국의 진보세력이 정말로 ‘혁신’을 이루는 데 아주 절실한 두 가지 지혜만 생각해보겠다.

지난 9월5일 오후 서울 동작구 대방동 통합진보당 당사 앞에 경찰이 서 있다.한겨레 박종식

지난 9월5일 오후 서울 동작구 대방동 통합진보당 당사 앞에 경찰이 서 있다.한겨레 박종식

첫째, 많은 이들이 이제 종북 세력과 확실하게 절연해야겠다고 공언하는 것을 들을 수 있지만 실제로 과연 ‘주사파’가 기존 진보세력에서 분명히 고립될 것이라고 내다보는 이는 많지 않다. 절연을 결심하는 이들의 진정성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글로 또 말로 굴러가는 담론의 장을 떠나서 현실로 가보자. 지역이든 작업장이든 실제의 사람들을 조직해서 무언가 일을 만들어야 하는 현장에서 가장 헌신적이고 신뢰를 주는 이들의 다수가 바로 이 ‘주사파’와 긴밀히 연결돼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말 이들과 절연한다면 완전히 새로운 일꾼들로 새롭게 사업을 시작해야 하는 판이지만, 그렇게 큰 비용을 치르면서 관계를 정리할 수 있을 만큼 결기가 센 이들이 얼마나 될까. 요컨대 절연해야 한다는 말이 아무리 옳더라도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현실적으로 실천에 옮기기 힘들다는 것이다. 결국 시간이 지나고 좀 가라앉으면 상황은 또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른 길이 있고 없고는 중요치 않아

좀바르트가 말한 ‘창조적 파괴’는 ‘창조’가 먼저 벌어지고 그것이 ‘파괴’로 이어지는 행복한 상황이 아니다. 먼저 ‘파괴’가 일어나고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와중에 창조가 일어나게 된다. 그가 든 예는 바로 1차 산업혁명을 가져온 석탄과 코크스 사용의 혁신이다. 유럽 국가들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지고 특히 해군력 강화가 중요해진 18세기 동안 목재 수요의 폭발적 팽창으로 거의 모든 나라의 삼림은 남아나지 않았다. 연료도 문제였지만 물품을 만들 원재료의 공급도 심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유럽 어디라 할 것 없이 석탄을 더 많이 캐내려는 노력이 일어나고 제철산업의 비약적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대안이 창조되면 그것을 따라 혁신하겠다’는 말은 ‘그 전에는 파괴도 혁신도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역사상 명멸해간 무수한 집단 중 마지막 위기의 순간에 혁신의 필요를 외치지 않은 집단은 거의 없다. 문제는 ‘뾰족한 혁신의 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흘러오던 대로 흘러가겠다는 태도를 버리지 않은 것, 즉 ‘창조’와 ‘파괴’의 순서를 착각한 데 있다. 틀린 길인 줄 알면서도 ‘다른 길이 없지 않은가’라면서 계속 가다가는 낭떠러지를 만날 뿐이다. 이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다면 즉시 방향을 바꾸든가 아예 되돌아가는 게 낫다. 다른 길이 있고 없고는 중요치 않다. 길이 없다면 돌무더기 풀숲으로라도 헤치고 들어가야 한다. 새 길은 그렇게 해서 나는 것이며, 그게 바로 ‘창조’가 벌어지는 순간이다.

둘째, 새로운 혁신을 외치는 이들이 막상 시작하는 작업이 ‘원칙과 관점을 다듬는 것’인 경우를 지겹게 봐왔다. 그 작업을 거치면서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소중히 여겨온 가치와 신념 등의 정수(精髓)를 추출해내고, 이를 신줏단지처럼 틀어쥔다. 그래서 무슨 논의를 벌이든 어떤 새로운 방향 및 제안을 검토하든, 이 신줏단지 앞에서 용인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무엇이든 채택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리 밤새워 토론하고 장시간의 회의를 거친다고 해봐야 결론은 항상 하나 마나 한 진부한 이야기로 끝나게 마련이다. 그다음에는 또 ‘혁신’이라는 구호가 나오게 되고, 똑같은 과정이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좀바르트가 ‘창조적 혁신’의 직접적 영감으로 삼았던 것은 니체의 였을 가능성이 높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의 운명을, 또 인생의 본질을 끊임없는 창조와 전진이라고 역설한다. 이렇게 창조와 전진을 위해 몸부림치는 이가 반드시 제일 먼저 깨버려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그 신줏단지다. “깨버려라, 선한 것들과 정의로운 것들을 깨어버려라! 오, 형제들이여, 진실로 이 말을 이해했는가?” 그러한 몸부림으로 ‘창조’해내는 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선’과 새로운 ‘정의’, 즉 변해가는 세상에서 또 변해가는 스스로가 정말 자신을 고양시키고 힘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새로운 원칙과 관점인 것이다. 그러니 본래의 ‘원칙과 관점’은 당연히 깨지고 바뀌어갈 것임을 각오해야 하며 오히려 스스로 그러한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옳다. 그런데 그것을 되레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있으니 무슨 변화가 생기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요컨대 ‘창조적 파괴’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하고서 아무 길도 없는 황무지로 나아가는 미친 짓을 함축하는 개념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눈을 들어 기업 세계를 한번 보기 바란다. 이번달에도 수많은 업체가 파산해 사라졌으며 수없이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자본주의 영리 활동의 세계는 거대한 권력과 독점과 특권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결과를 내지 못하면 비정하게 내쳐지고 뭉개지는 세상이며, 곧 ‘창조적 파괴’가 무수히 반복되는 세계이기도 하다.

무능력·실패에 책임지지 않는 진보

진보세력이 현실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인 것은 1990년대 이래 실로 오래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진보세력 내의 그 누구도 그러한 무능력과 실패 때문에 스스로 물러난다든가 책임지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이쪽 세계에는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물어 경영자를 자르는 ‘오너’나 ‘주주총회’도 없고 일하는 이들을 다그쳐 대량으로 쫓아내는 ‘해고’도 없다. 즉, 어떤 형태로든 ‘창조적 파괴’를 스스로에게 강제하기 위한 장치와 논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러한 강제의 요구는 엉뚱한 방법으로 나타나게 된다. 4천만 국민을 턱이 빠지도록 어이없게 만든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는 바로 그러한 강제가 나타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그다지 많이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점도 함께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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