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경제는 인류가 만들어낸 기적의 발명 품으로서 지난 몇 세기 동안 가히 천지개벽 이라 할 물질적 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무 수한 장점만큼이나 많은 약점도 있으며, 그 가장 치명적인 것 중 하나는 ‘배제’다. 이는 오늘날 전세계를 뒤덮는 만성적 대량실업으 로 나타나고 있다. 자기 능력을 발휘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많으며, 그 때문에 제 대로 충족되지 못한 사람들의 욕구도 넘쳐 나고 있다. 이 과소생산·과소소비 상태가 화 폐경제의 필연적 귀결이라면 이들의 능력과 욕구를 짝지을 수 있는 다른 경제적 조직 방 식을 강구해내야 하고, 그 점에서 협동조합 등의 의미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1등만 기억하는’ 화폐경제
화폐경제는 모든 생산자가 자신의 이익 을 ‘수익성’이라는 화폐가치로 환산해 행동 하며, 또 모든 소비자가 자신의 욕구를 ‘지 출액’이라는 화폐가치로 환산해 행동할 것 을 규칙으로 하여 조직되는 경제 형태다. 인 간 세상에서 유·무형의 만사만물을 모조리 단일한 계산 단위로 통일시키는 이러한 사회 적 기술 덕분에 모든 생산자와 소비자는 누 구의 명령이나 개입이 없어도 경제행동을 스 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엄청 난 규모의 노동분업을 효율적으로 이루는 기적을 낳았다. 아직 시장에 등장하지 못한 인간 능력과 욕구가 있다고 해도 걱정할 것 이 없다. 시장경제에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 한다면 조만간, 아니 순식간에 별의별 상품 이 등장할 것이며, 또한 소비자가 정말 원한 다면 순식간에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저렴 한 가격이 되어 모두 팔리게 될 것이다. 이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욕구와 능 력은 다 자기 짝을 찾아 행복한 결혼을 하게 되고, ‘보이지 않는 손’이 가져다주는 ‘천국의 복락(bliss)’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이것이 경제학의 희망찬 가르침이다.
문제는 뒷부분에 있다. 정말 그런가? 화 폐경제는 정말로 모든 이들의 능력과 욕구 가 제 짝을 찾아가도록 흥정을 붙이고 가격 표를 매겨 결혼시켜주는 선량한 중매쟁이인 가?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화폐경제에서 실제 생산자와 소비자를 결혼시켜주는 주체 는 하느님의 소매 자락이 펄럭 비치는 ‘보이 지 않는 손’이 아니라 자본의 투자다. 그리고 이를 행하는 투자자의 유일한 관심은 수익 성이다. 따라서 수요가 좀 적더라도 아주 큰 마진 이윤을 누릴 수 있는 경우와, 마진 이 윤이 적더라도 아주 많은 사람들의 수요가 있기 때문에 박리다매가 가능한 경우에 투 자는 집중된다. 어느 경우이든 무수한 생산 자들이 병존하는 상황은 거의 용납되는 법 이 없다. 기술이든 자본력이든, 아니면 정치 적 뒷배경 같은 동물적 근육이든 가장 크게 동원할 수 있는 한 생산자가 싹쓸이를 하고 순식간에 독과점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화폐경제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요컨대 어느 기업의 광고 카피처럼, ‘1등만 기억하는’ 것, 그것이 화폐경제의 실제 모습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돈계산과 돈벌 이를 방법으로 조직되는 이 화폐경제의 좁 은 범위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지구상에 존 재하는 몇십억 인류가 매일매일의 삶을 이어 가는 ‘살림살이 경제’의 큰 틀을 응시해보라. 여기에는 1등짜리 능력을 가진 생산자만 살 아가는 게 아니다. 큰 수익으로 연결될 수 있 는 욕구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내 뒷집에 사는 학생은 착하고 똑똑하지만 미국 하버 드대학을 갈 수 있을 만큼은 못 된다. 또 선 배 하나는 자격증이 여럿 있고 참으로 성실 한 사람이지만, 부장 이후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승진 과정을 뚫을 만큼은 못 돼 결국 잘리고 말았다. 부모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아이들에게 악기를 하나쯤 가르치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비싼 악기값과 교습비, 그리고 만에 하나 아이가 ‘모차르트
의 환생’임이 밝혀지는 사태가 벌어질 경우 그 뒷바라지를 위해 가정경제가 초토화되는 악몽 등이 두려워 대부분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도 모두 자기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 보람 있게 일해보고 싶어 하며, 또 돈이 없어 부끄럽게 꼭꼭 마음속 깊이 숨겨놓은 욕망이지만 이따금씩 꺼내 쓸쓸히 쓰다듬으며 살아간다.
서양 문명의 최고 예언자, 로버트 오언하지만 이들의 능력과 욕구는 화폐경제에서 실현될 전망이 희박하다. 알고 보니 화폐경제는 푸근한 삼신할머니가 아니라 야멸찬 고가(高價)의 결혼중개업체였을 뿐이다. 1등이 될 만큼 뛰어나지 못한 일꾼들과 돈을 낼 만큼 여유가 없는 이들의 욕구처럼 초라하고 범상한 갑남을녀는 맺어줄 생각이 전혀 없다. 그래서 화폐경제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만성적 대량실업이 장기화되며, 충족되지 못한 사람들의 욕구불만으로 각종 사회 불안과 일탈 행위가 늘어만 간다. 이 과소생산·과소소비 그리고 그로 인한 대다수 인간들의 능력과 욕구의 ‘배제’, 이것이야말로 화폐경제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지난 30년간 지구적 규모에서 미친 듯이 팽창하던 화폐경제의 뒤탈로 나타난 장기적 대량실업과 사회적 욕구불만은 도처에서 심각한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이런 사태가 터졌을 때 구원투수로 종종 등장하던 국가의 실업 대책과 사회정책은 지독히 단순화된 ‘케인스식’ 처방 때문에 제대로 방향을 못 잡은데다 그나마 재정위기로 손발이 묶인 상태다. 궁여지책으로 주요 국가들의 중앙은행이 돈을 계속 찍어대지만, 찍어대는 족족 돈은 모두 고수익을 좇아 각종 자산시장에서 투기성 자금으로 돌아다닐 뿐 대다수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실제 생산과 소비의 조직에는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절망에 빠진 이들은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을 결국 끝낸 것이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한 군수경제의 팽창이었음을 상기하며 ‘혹시 화성인이 쳐들어와주지 않을까’ 하는 썰렁한 농담이나 주고받고 있다. 화폐경제만을 이론의 대상으로 삼는 경제학은 결국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말았다.
19세기 초 영국에는 칼 폴라니가 예수 그리스도 이후 서양 문명 최고의 예언자였다고 극찬한 로버트 오언이 살고 있었다. 그는 착취니 공황이니 하는 화폐경제 내부의 현상 분석에 온 정신을 쏟는 대신, 바로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배제하는 것을 화폐경제의 가장 치명적 약점이라고 보았다. 이들이 지닌 평범하지만 소중한 능력과 욕구는 모조리 방기되고, 이들의 ‘살림살이 경제’가 파괴됨에 따라 이를 기초로 삼는 사회 전체가 파괴되며, 그 결과 사람들은 인간의 형상을 빼앗기고 돈계산과 이기심만 남은 존재로 퇴락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따라서 그가 선택한 해결책도 혁명이나 정권 탈취 같은 것이 아니었다. 화폐경제가 내팽개친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과 욕구가 다시 만나 짝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대안적 경제조직 형태를 마련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협동조합이었다.
‘쉽게 세우는 영리기업’ 아냐세계경제 위기 이후, 보통 사람들의 능력과 욕구로 이루어지는 ‘살림살이 경제’를 조직할 수 있는 대안적 장치로서 협동조합이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큰 붐이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조심할 필요가 있다. 협동조합의 문제의식을 충분히 공유하지 못하고 협동조합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영리기업’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만연하게 된다면, 협동조합 운동 자체도 성공할 수 없을뿐더러 그 후과는 또 다른 좌절을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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